브레멘 용병대의 닷새간
0.
아, 아. 몇 번이고 목소리를 내 보았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없었다. 지직지직 잡음을 내던 링크펄은 그 잡음이 마지막 호흡이었던 양 이제는 죽은 듯한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아 젠장, 욕설을 내뱉어 봐도 몇 번이고 흔들어 봐도 수명을 다한 링크펄이 되살아날 기미는 없었다. 에스티니앙은 링크펄을 벗어 눈밭에 던졌다.
멀리 나왔다는 자각은 있었다. 여관방에 짐도 다 풀고 요기나 하러 내려간 식당에서 사룡의 잔당들에 대한 정보를 들은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갑옷을 다시 입기는 귀찮았고, 굳이 입어야 하는 일도 아니었다. 창만 쥐고 마을 밖으로 나온 것도 사실 딱히 무모한 일은 아니었다. 창을 든 푸른 용기사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이 변두리 시골 마을에 존재할 턱이 없었다. 만약의 경우가 생긴다 해도 연락수단인 링크펄과 비상금이 있다. 위험의 소지라곤 만들래도 없었다. 자연재해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끄르륵 하는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 툭 가라앉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 징조였다. 발밑을 가벼이 흔들던 진동이 공기에 퍼지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눈사태의 위험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 희생자가 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는 어딘지도 모를 눈밭 한가운데였다. 창은 없었고, 엉망진창으로 찢어진 옷 안에는 지갑도 보이지 않았다. 눈사태에 휩쓸린 사이 신발도 벗겨졌는지 빨갛게 얼은 맨발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나마 신체가 멀쩡하다는 것 정도였다. 왼발이 이상하게 부어올라 디딜 때마다 쑤시듯 아프긴 했지만 이 정도면 멀쩡하다. 문제는, 기껏 다행인 그 점이 빛조차 보지 못하고 사그라들 것 같은 이 상황이었다.
앞뒤 옆옆으로 파노라마처럼 돌아봐도 보이는 건 까마득한 눈과 앙상한 나무의 숲뿐이었다. 새까만 밤이었다. 겨우 몇 걸음 걸은 후에야 발에 감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빨갛게 언 발을 바라보는 눈꺼풀이 가만히 닫히기 시작했고, 동시에 의식도 눈송이마냥 찬찬히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죽는 건기. 용을 잡다가 죽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전장에서 숨을 거두는 것도 아니고 눈사태로? 눈사태로 죽는다고? 에스티니앙은 까만 하늘을 쳐다보았다. 농담도 정도가 있다. 제 몇대 푸른 용기사는 전장에서 전사하였고, 몇대 푸른 용기사는 가족의 품에서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제 몇대 푸른 용기사 에스티니앙은 눈밭에서 동사하였습니다가 역사에 기록된다고? 아이메리크가 관뚜껑 덮으면서 제 친우 에스티니앙은 누구보다 강하고 용맹하였으며 한평생 니드호그를 쫓아 동사하였습니다, 를 읽는 걸 하늘에서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야 한다고? 오년 후쯤이면 광장에서 아 그 전 푸른 용기사 에스티니앙 아 그래 그 동사한 사람, 아니 아사였나? 실족사 아니었어? 아….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냐? 같은 대화가 오갈 거라고?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장례식의 풍경과 회색 묘비와, 살금살금 눈이 쌓이는 시든 꽃다발, 아무 특별한 일도 없이 평소같이 밝아오는 이슈가르드의 아침과 저무는 밤, 그런 것들을 생각하니 문득 멍해졌고 금세 울적해졌다. 아이메리크 그 자식 내가 죽으면 어떻게 살지, 하는 생각이 일순 고개를 들었고 다음 순간 잘 살겠지, 아니 그야 정말 잘 살겠지 아주, 하는 생각이 또아리를 트는 뱀의 꼬리처럼 차근히 가라앉았다.
빽빽히 들어찬 까만 나무의 가지들과 하늘을 올려다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래, 여기서 죽었다간 시체도 못 찾겠지 싶어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잡고 턱 턱, 산을 등지고 이십 걸음쯤 걸었더니 희미하게 노란 빛이 보였던 것이다. 환각인가. 에스티니앙은 눈을 감았고, 가늘게 떴다. 환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희미하게 들리는 말소리도, 환청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꺼져 가는 의식 틈새로 주마등이니,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니 가장 즐거웠던 인생의 순간이니 하는 것들은 지나가지 않았다. 샛노란 빛이 눈꺼풀 아래로 발갛게 새어들어올 뿐이었다.
1.
눈을 뜬 것은 꼬박 하루 후였다. -하루 후였다고 한다. 툭 툭 소리가 들려서 배고픈 늑대라도 어슬렁거리나 싶어 램프를 들고 와봤더니 웬 산짐승한테 찢어먹힌 시체 같은 게 나무 틈새 사이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어우 씨 깜짝이야, 하고 뒷걸음질치다 그래도 묻어라도 줘야겠단 생각에 손을 올렸더니 호흡이 있더라는 거다. 살 사람이면 살겠지 싶어 큰 상처만 대충 치료하고 따듯한 방에 눕혀 놓았다고 말해 준 것은 당나귀였다. 환술에 재주가 있어 다리의 동상도 취미삼아 조금 치료해 두었다며 어깨를 으쓱하는 억양에는 귀족 자제 특유의 으스댐이 담겨 있었다.
모닥불 하나, 얼기설기 지어진 벽돌집 하나, 막사 두 개, 의자 세가 빼곡히 들어찬 공터에는 작은 깃발이 꽂혀 있었다. 우리는 이슈가르드의 용병대라며 남자 하나가 멋들어진 이름과 숭고한 목적을 말했지만 별로 기억할 가치는 없는 것이기도 했다. 요컨대 신전기사단에 들어갈 실력은 없고, 작위를 물려받을 사정도 안 되고, 작위가 없어도 떵떵거리며 호휘호식 하고 살 명문 귀족도 아닌 어중이떠중이 집단이었다. 개중에서도 기사단 같은 건 안 맞아, 한심하게. 그런 거 백날 해봤자 누가 알아나 줘? 같은 대사를 뱉으면서 죽을 때까지 대박이니 한탕이니 하는 소리만 하다 끝내 이루지 못한 출세욕을 마지막 씨앗처럼 품고 묻히는 녀석들 말이다.
수탉. 개. 당나귀. 남자들의 자기소개가 끝난 후 에스티니앙은 속으로 각각의 호칭을 정했다. 이름까지 기억해 줄 가치가 없는 녀석들이었다. 수탉 같은 목소리에, 개 같은 얼굴에, 당나귀 같은 표정이 특징적인 셋에게 딱 적당한 호칭이었다. 에스티니앙은 미간을 모았다. 사실 아무래도 좋다. 이 녀석들의 한심함 같은 건 문제가 안 된다. 정말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태도부터 설마하긴 했지만 정말로 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이슈가르드의 푸른 용기사다. 말을 마치자 이쪽을 쳐다보며 자기소개를 기다리던 여섯 개의 땡그란 눈동자가 동시에 픽 하는 조소의 빛을 띠었다. 웃음을 터트린 것은 당나귀였다. 구르다 어디 부딪혀서 머리 어떻게 된 거 아냐? 숨도 쉬지 못하고 웃는 통에 호흡도 힘들어진 듯 눈물까지 찍어 가며 배를 잡는 당나귀 뒤로 현 푸른 용기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아느냐고 훈계를 시작한 게 개였고, 사기꾼 같은데 여기 두지 말고 내쫓자며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모닥불에 장작을 던지던 것이 수탉이었다. 내 얼굴이 이렇게 안 퍼졌나. 알 놈들은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에스티니앙은 머리를 털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뭐, 그렇다. 푸른 용기사 하면 아 그 이렇게 생긴 투구에 이렇게 생긴 갑옷 입고 이렇게 생긴 창 든 사람으로 통하고 있는 실정에 맨얼굴로 정치활동을 해댄 것도 아니고, 투구조차 잘 벗지 않았고, 그 흔한 초상화 한 장 안 그렸으니 모를 만도 하다. 어 저거 푸른 용기사 아닌가, 하고 긴가민가하던 녀석이라도 아무것도 없는 눈밭에서 혼자 쓰러져 동사 직전이었던 그 상태를 봤다면 아마 아니겠지 싶었을 것이다. -이슈가르드로 돌아가야 해. 연락 수단 없어? 마차 좀 불러 줘. 이어진 말에도 세 남자는 각각 웃고, 한숨을 쉬고, 흰눈을 뜨고 쳐다볼 뿐이었다.
역시 사기꾼이니 빨리 내쫓잔 수탉을 말린 것은 당나귀였다. 사기꾼이라면 적당한 귀족 자제나 사칭하겠지 미쳤다고 푸른 용기사의 이름을 대겠냐는 게 그 이유였다. 극히 논리적인 근거에 납득한 듯 수탉은 입을 다물었다. 가장 넉살좋아 보이던 당나귀가 말했다. -뭐, 좋아, 가짜 용기사 씨. 이렇게 하자. 어차피 우리 닷새 후에 이슈가르드로 가거든. 여기만 죽치고 살 순 없잖아? 왔다갔다 하고 있다고.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우리 일 좀 돕고 지내면 그때 같이 태워 줄게. 삯도 제법 나오는데, 나쁜 제안은 아니지? 그간 먹고 자는 건 여기서 해도 돼. 선심쓴다는 투의 귀족 특유의 으스댐이 녹아 있는 말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개가 지도를 펴고 짚어 준 이쪽의 위치는 생각보다도 외지였다. 근방에 신전기사단이 주둔하는 군사기지는 없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마을에 저는 발을 질질 끌고 어떻게 도착한다 해도 자기 얼굴을 알아보고 도와줄 녀석이 있다는 확증은 없다. -닷새간 여기 처박혀 있는 수밖에 없나. 에스티니앙은 한숨을 뱉었다. 어차피 이 발이 온전해지려면 그 정돈 걸릴 테고, 목숨을 부지한 대가로 며칠의 시간 낭비라면 비싼 값은 아니다. -창. 에스티니앙이 내민 손을 셋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 말이다. 여분의 창 있지? 무기가 있어야 뭘 할 거 아냐."
"우리, 창 쓰는 사람 없는데. 난 검이고…."
이런 미친, 창도 못 쓰면서 무슨 용을 잡겠다고 죽치고 있어. 패션으로 음악 하는 놈들도 최소한 악기는 사던데 패션 용병질하면서 이백 길짜리 창 하나 안 사뒀냐.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에스티니앙은 깊은 한숨으로 대화를 종료시켰다. 그 한숨에 제발이라도 저린듯 셋은 동시에 뭔가 변명을 시작했는데 대충 요약하자면 우리는 용만 잡으려는 집단이 아니고 이단자와 기타 이슈가르드의 안전을 위협하는 거물을 잡는 걸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은 안 하지만 대박은 칠 겁니다, 라든가 전 주간복권 당첨될 거라 개미같이 엠지피 모으는 사람들 잘 이해가 안되네요, 같은 말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은 소리들이었기에 주의깊게 듣지는 않기로 했다. -그럼 우리는 수상한 이단자 녀석들을 쫓으러 가볼 테니까 용기사 씨는 일단 근처 순찰 좀 해 줘. 당나귀가 말했다. -사나운 산양 같은 녀석들이 가끔 어슬렁거리거든. 제법 비장한 말투로 말을 덧붙인 것은 개였다. 산양에 위협을 느낄 정도면 용병질은 때려치우고 그냥 저 어디 여관에서 평생 추억의 일기장이나 돌려보다가 영원한 안식이라도 맞는 편이 낫지 않겠나 싶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에스티니앙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입구로 걷다 공터 한쪽에 흩어진 장작 부스러기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가느다란 장작 사이엔 꽤 길고 튼튼한, 장작이라기엔 몽둥이 쪽에 가까운 나뭇가지가 하나 있었다.
마물이라도 만났을 때 휘두를 요량으로 쥔 나뭇가지였지만 기지로 돌아올 때 나뭇가지는 이미 지팡이 용도가 되어 있었다. -오래 걷는 건 역시 무리였나. 얇게 쌓인 눈에 세 개의 자국을 남기며 왼발을 질질 끌고 절뚝절뚝 빛바랜 막사 안으로 들어오고 있으려니 하얀 입김은 어느새 한숨이 되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차라리 푸른 용기사라는 걸 믿어주지 않아서 다행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절뚝절뚝 막사 안으로 들어오고 있으려니 공터에 앉아있던 수탉과 개가 손을 들어 보였던 것이다. 이단자를 쫓으러 떠난다고 했던 녀석들이 왜 근처를 순찰하고 온 자기보다 먼저 돌아온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 평생 이해할 수 없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낭비인 녀석들이었다.
가짜 용기사 씨, 술 한잔 할래? 개의 권유에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흔들었다. 네모 반듯한 종이곽에 가지런히 담겨 있는 저녁식사는 어디선가 조달받은 것을 다시 데우기만 한 반조리식이었다. 이런 녀석들이니 지들이 사냥을 해서 뭘 먹을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적당히 그릇을 비운 에스티니앙은 벽돌 건물로 들어가 얇은 모포를 펴고 누웠다. 습기찬 베개에서는 눅눅한 곰팡내와 젖은 벽돌 냄새가 났다. 벽 밖으로 들려오는 셋의 목소리는 흐릿한 신호처럼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가끔 폭소와 건배 소리가 폭죽처럼 터지는 가운데 흘러가던 목소리들은 이윽고 귓속에서 꺼지듯 잠잠해졌다. 늙수그레한 당나귀, 멍청한 개, 병든 수탉. 용병대보다는 저 뭐 어린이 캠핑족 쪽에 더 가까울 듯한 집단과의 하루는 그렇게 끝이 났다.
2.
춥다.
이불을 여미며 움츠린 몸을 고등어마냥 뒤집어대던지 이십 분째, 결국 에스티니앙은 스스로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모르겠다. 이 나이가 되도록 스스로 열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재주는 없었다.
가끔 열을 재 주던 것은 아이메리크였다. -자네는 은근히 잔병치레가 잦은 사람이었지. 아이메리크는 열을 가늠해 본 후엔 항상 측은한 표정으로 쳐다보곤 했다. 딱히 몸상태가 나쁘지 않은 날에도 물끄러미 얼굴을 쳐다보다 손등으로 이마를 짚어 보거나 한 손으로 이쪽 뺨을, 남은 한 손으론 자신의 뺨을 짚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다. 대부분의 경우는 열이 있었다. 몸을 좀 챙기라는 잔소리와 함께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 주는 손가락 마디가 툭툭 턱이나 목에 닿는 날이면 사실 이 녀석은 모든 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고개를 들곤 했다. 사실은 이 마음도 감정도 모든 걸 다 빤히 들여다보고 있고, 그걸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흩어지는 날이면 꼭 앓곤 했다. 일 년에 한두번씩 통과의례마냥 심하게 열이 끓는 날이면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차라리 이용이라도 했으면 낫겠단 생각이 흐린 의식 사이에서 죽순마냥 돋아나곤 했다. 이슈가르드 기사단 내의 방이나 커르다스의 이름없는 여관, 그리다니아 북쪽 숲의 습기찬 동굴 안, 어디서든 혼자 몸을 기대고 앓고 있을 때면 특히 그랬다. 차라리 철저하게 먹이나 주고 이용이라도 하면, 이럴 때 잔소리하면서 차나 타오고, 혼자 쓸데없는 소리 늘어놓으면서 옆에 앉아있으면 이용당해 줄 수도 있는데, 같은 생각들이 포자처럼 머리 사이사이를 날아다녔다. 물론 몸이 멀쩡해지면 사고는 냉정해졌다. 그나마도 없는 눈치 도토리마냥 모아서 정치판 물밑싸움에나 올인하고 있는 꼬라지가 몇년째인 녀석이 잘도 알아차려서 퍽이나 이용하겠다. 사람 대 사람 관계에서 눈치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룰인 세상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마냥 돌진해대는 점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가끔은 눈치가 좀 있었으면 좋겠고, 생각해 보면 역시 없는 게 다행이기도 했고, 그래도 가끔은 좀 있었으면 좋겠고, 그래도 역시 없는 게….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잡고 동그랗게 모여 한참 춤을 추고 있으려면 아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퍼뜩 들어 머리를 털곤 했다.
…총장이.
에스티니앙은 눈을 떴다. 문틈 사이로 복도의 목소리가 간간히 끊기듯 이어지듯 들리고 있었다. 총장이, 난 이번에, 그래, 안 돼, 확실한, 맞아, 봤으니까, 계획은... 몇 개의 단어들이 뚝뚝 끊긴 꼬리처럼 귀에 스며들었다. 에스티니앙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여섯 개의 눈동자가 또로록 이쪽을 향했다. 눈동자마다 당혹이 들어차 있는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아, 어제 순찰 좀 돌았다고 몸살인 것 같더라, 가짜 용기사 씨. 과장된 몸짓으로 짐짓 목소리를 높이며 손을 흔든 것은 당나귀였다. 개는 냉큼 일어나 모닥불에 장작을 더하기 시작했고, 수탉은 기지개를 켰다.
"아이메리크가 뭐?"
"아이메리크… 뭐?"
"총장 얘기 했잖아. 그 녀석 얘기지?"
"그랬나?"
별 얘기 안 했지? 안 했지. 안-안-했지? -했지. 돌림노래라도 부르듯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개구리마냥 합창하고 있는 꼴을 보다 에스티니앙은 입을 다물었다. 대화를 더 길게 이어갔다간 도저히 그 꼴을 보지 못하고 주먹이라도 날릴 것 같았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또 무언가 눈빛을 교환하던 셋은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신전기사단의 총장이 이 근방에 온 것 같더라. 같더라- 같더라. 이 시골까지 왜 시찰을 나왔대. 그렇지? 그렇지. 사칭죄는 꽤 크게 처벌받으니까, 자넬 숨겨 줘야겠다는 얘길 했지. 했지? 했지. 유치원 학예회하듯 각자 한 구절씩 연극톤의 대사를 뱉어낸 셋은 갑자기 청춘드라마의 한 장면마냥 와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어깨를 두드렸다. -나흘만. 나흘만 조용히 살다 성도로 돌아가자. 어제만 해도 세 번, 앞으로도 서른 번쯤 더 떠올릴 각오를 되씹으며 에스티니앙은 자기도 모르게 꽉 쥔 주먹에 힘을 풀었다. -우리는 오늘 근방을 순찰할 거다, 용기사. 수탉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적당히 산책하다 맛있는 거 좀 먹고 커피 한 잔 하다가 사진좀 찍고 들어갈게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은 말이었다. 어린이 캠핑단, 아니 용병대에서 에스티니앙에게 배당한 일은 추위를 덜기 위한 물소 가죽을 조달하는 일이었다. 물소떼가 있는 위치를 손짓으로 알려주며 수탉은 또 쓸데없이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의 물소는 포악하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걸. 덩치만 보고 질겁해서 내빼진 말고. 에스티니앙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가죽은 어떻게 벗기라고."
"아, 그럼 이걸로."
당나귀가 검을 건네주었다. 엘레젠 특유의 어깨 빠질 것 같은 과장된 인사도 함께였다. 물소 가죽 벗기라고 허리에 찬 칼 건네주는 이 꼴이 지 산책나간다고 인증하는 현장 그 자체임에도 불구 왜 아이에게 구명정 양보하는 최후의 신사마냥 쓸데없이 유려하게 개폼을 잡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에스티니앙은 검을 받아들었다. 숨만 잘못 쉬어도 죽을 것 같은 비리비리한 물소들을 잡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말 어려운 것은 가죽을 벗기는 일이었다. 검집에서 빼낸 칼은 일순 골동품으로 착각할 정도로 녹슬어 있어 사과조차 깎지 못할 수준이었다. 돌멩이에 내 손톱을 갈아서 벗기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싶은 부아를 누르며 수도승 도닦는 기분으로 가죽을 벗겨 가져갔더니 왜 가죽에 피가 묻어있냐고 질겁하는 세 녀석에게 욕지거리를 퍼붓지 않은 것이 최고의 인내심을 발휘한 구간이었다. 가죽을 벗기면 자동으로 소파같은 게 된다고 생각하는 이 머저리들, 닭도 죽기만 하면 알아서 깃털이 빠지고 사지가 분리되어 순살통닭 같은 게 된다고 알고 있을 이 문명 삼총사에게 그만 이 년치 인내심을 다 써버린 듯한 피곤함이 밀려와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숙였다. -일찍 잔다. 손을 들어 보이고 건물 안으로 들어온 에스티니앙은 모포를 폈다.
밖에서는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와 발로 땅을 밟는 소리,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대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명백히 목소리를 죽여 무엇인가를 논의거리고 있다. 멍청한 속삭임의 기운이 회색 공기 위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머저리들의 음모만큼 골치아픈 것도 없는데. 에스티니앙은 몸을 두어 번 뒤척였다.
3.
발은 많이 나았다. 뛰거나 점프하는 건 아직 무리지만 걷는 건 뭐, 힘들지 않은 정도였다. 생각해 보니 이건 나은 게 아니라 그냥 익숙해진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발의 부목을 덧대고 있으려니 수탉이 갑자기 툭 검집을 던졌던 것이다. 투박한 디자인이지만 세월의 흔적은 없다. 검집을 잡고 손잡이를 쭉 빼자 두꺼운 날이 좌르르 빛났다. -웬 장검? 고개를 돌리자 수탉은 눈을 내리깔고 우아하게 손목을 돌려 숲 쪽을 가리켰다.
-저 쪽에 꽤 유명한 마물이 있거든. 수탉은 지적으로 행동하려 할수록 멍청함이 돋보이는 타입이었다. 자네. 처리해 줄 수 있겠나? 에스티니앙은 손에 든 검을 뒤집어 살폈다. 역시 새것이 맞다. 사이좋게 어디서 쇼핑이나 한 건가. 기왕이면 창이었으면 좋았을걸. 뭔데? 수탉은 엘레젠 특유의 손놀림으로 미간을 짚곤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그것은 숲의 악령이라고까지 불리는 거대한 괴수, 로 시작하는 삼류소설 프롤로그같은 도입부를 듣자마자 잠이 오기 시작했지만 참고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과연 설명은 예상대로 건질만한 특성이나 주의점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말하자면 진짜 크고 진짜 세고 진짜 무섭고 진짜 어쨌든 진짜 와 아주 진짜 그게 아주 막 어 그런 마물이야 정도의 가치를 지닌 그것이었다. 형용사만 들으면 투신 오딘을 방불케 하는 전설의 마물이 따로 없었지만 이 녀석들의 과장을 생각하면 망아지 새끼 정도겠지. 그런 생각으로 찾아간 자리에는 뜻밖에 켄타로우스 부족 족장 정도는 될 법한 마물이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손에 쥔 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창이었으면 좋았을걸.
무기가 바뀐다고 전투감각이 리셋되는 건 아니다. 멀쩡한 다리와 창이 있으면 십 초면 해체까지 끝낼 수 있을 만한 녀석이니 일 분 정도면 되겠지, 생각했던 전투는 의외로 늘어져 다시 상태가 나빠진 발을 질질 끌고 기지로 돌아왔을 때는 한 시간 남짓이 흐른 뒤였다. 모닥불 옆에 피 묻은 칼을 던지자 여섯 개의 땡그란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유령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죽었으면 좋겠나 싶었나? 한심할 뿐이지 막돼먹은 놈들은 아니었는데. 에스티니앙은 등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한심하든 막돼먹었든 어느 쪽이든, 대박을 칠 용병대란 녀석들이 이 대낮이 되도록 나가지도 않고 죽치고 있는 이 현실도 뭣도. 그냥 빨리 다리가 나았으면 좋겠고, 이슈가르드로 돌아갔으면 좋겠고, 그냥 빨리 예전 같은 생활로, 그런 생각을 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잠을 깨운 것은 당나귀였다. 뒤로 다른 둘도 머쓱히 웃고 있는 채였다. 갑자기 다정하게 구는 셋에게선 친하지 않은 친구의 깜짝 생일파티라도 하는 어색함이 느껴졌다. 곁에 다가와 앉은 셋은 아무도 묻지 않은 이야기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실은 당나귀는 꽤 명문 귀족가의 장남이었는데 집이 몰락해 급히 검술을 배웠다는 둥, 수탉은 한참 잘나가던 기사였는데 줄을 잘못 섰다는 둥 요약하자면 우리는 원래 이런 데서 썩어갈 인재가 아니고 기회가 있으면 남들 보란듯 잘 살 수 있다, 뭐 그런 이야기였다. 이쯤 되면 이 멍청할 정도의 솔직함이 부럽다. -이렇게나 솔직할 수 있다니. 부끄러움도 수치도, 뒷감당도 생각하지 않고 바닥까지 내보일 수 있다니. 그런 생각이 희미하게 들었다가 가라앉았다. 에스티니앙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말을 잘랐다. -그래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셋은 눈치를 교환하다 목소리를 낮췄다.
"얼마 전에, 신전기사단 총장이 이 근방에 왔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꽤 오래 머무는 것 같아. 게다가, 호위도 안 붙이고 온 것 같고.
"가끔 하는 짓이지. 그래서?
셋은 침묵했다가, 이내 두서없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는 반역 생각은 조금도 없고, 현 총장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겠지. 생각 자체가 없어 보이니까. 에스티니앙은 묵묵히 말을 씹어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가, 총장을 습격해서."
"…습격?"
"아, 오해말게. 해를 가하자는 게 아니라 말하자면 연극을 하자는 거다."
수탉이 팔짱을 끼었다. 우리 중 하나가 총장을 습격하는 연기를 하고, 나머지가 타이밍을 맞춰 위기에서 구해내 공을 세우자는 걸세. 그냥 짜고치는 연극일 뿐이야. 하지만 우리의 공은 성도에 전해지겠지. 그 뒤는 정적이었다. 내용과 목적과 과정이 삼위일체로 정신나간 이 계획의 어느 부분부터 지적해야 할지도 감을 잡지 못하고 에스티니앙은 입을 벌린 채 세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백? 고백하는 건가? 껄렁한 깡패가 어이 그림 좋은데, 하며 시비를 걸고 있는 걸 정의의 용사가 구해주는 그런 삼십년 전 뽕짝 로맨스에나 나올 법한 그 시나리오 말하는 거 아냐? 이 녀석들은 대체 아이메리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괴한이 나타나면 주저앉아서 눈물이라도 흘릴 인간상으로 보이나? 아무리 요샌 책상에 옵션으로 붙어나온 자동인형처럼 앉아 사인만 하고 있다지만 검 잡으면 이 머저리들 정돈 날려버리고도 남을 텐데. 한참 뒤에야 깊은 한숨과 함께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털었다. -너희가 총장을 위기에 처하게 하는 게 일단 가능하긴 하냐? 개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 우린 무리일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너라면 가능할 것 같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에스티니앙을 향했다. 너는 정말로 강하더군. 숲의 주인을 처리하는 걸 보곤 정말 놀랐다. 개가 짝 짝 박수를 쳤다. 함께 이 계획에 동참하지 않겠나? 자네도 이 기회에 같이 출세하세. -아니, 이미 출세했는데. 정색하는 대답은 들을 생각이 없는지 수탉이 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현 푸른 용기사는 인성이 폐기물 수준이라던데, 이 기회에 자네도 진짜 푸른 용기사가 되어 보는 건 어떻겠나? 이런 참신한 머저리 계획에 말려든것도 모자라 왜 면전에서 구체적인 언어폭력까지 당하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를 할 수는 없었지만 결국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은 승낙했다. 머저리 용병대는 이 계획이 태초의 우주마냥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들끼리 진행할 것이 틀림없었다. 궁지에 몰리면 새끼를 물고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타조 같은 놈들이다. 일을 삐끗하기라도 했다간 아이메리크에게도, 그들 스스로에게도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다. 자신이 하는 편이 낫다. 무엇보다 이 진창을 빠져나갈 확실한 기회이기도 하다. 이 녀석들의 작당 같은 건 한 귀로 들어 놓고 적당히 그 근방까지 따라가 아이메리크가 보이면 어 총장씨 아냐, 이 먼 데까지 웬일이야, 마침 잘됐네 나 링크셀이 고장나서 어 그래, 이슈가르드로 돌아가게 마차 좀 불러 줘 그래 하고 말하면 될 일이다. 뒤에서 타이밍을 재고 있던 녀석들은 벙쪄서 지들끼리 도망이라도 치든지 나자빠지든지 뭐 알아서 살아남을 것이다.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꽥꽥 멍멍 왈왈, 꽥꽥 꼬끼오 소리가 들리는 소음의 소용돌이에서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숙였다. 지독히도 솔직하고 행복해 보이는 동물의 늪이 발을 적시고 있었다.
4.
멍청한 계획을 싫어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개중 하나는 계획이 끝도 없이 커진다는 데 있었다. 1 규모의 계획을 10으로 키우는 데 주저가 없는 것이 머저리들의 특징이었다. 물자도 기반도 대책도 아무것도 없이 다 잘될거란 긍정적 사고 하나만으로 빵반죽마냥 부푸는 계획은 그들만의 전매특허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의문의 괴한에게 습격당한 총장을 길가던 이름없는 용병대가 구해 주는, 그야말로 길가던 행인조차 부끄러워 고개를 돌릴 것 같은 쌍팔년도 시나리오는 마을에 도착한 시간이 이미 한밤중이란 예상 밖 요소로 인해 변경되었다. -저 여관에서 묵는 건 틀림없는데. 개가 자그마한 여관을 가리켰다.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셋은 눈을 마주보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를 딱 쳤다. -그래! 방으로 습격하자! 당나귀는 무슨 천재적인 생각이라도 난 듯 눈을 반짝였다. 용기사 씨가 저기 창문으로 들어가서 그래, 위협하고 있는 거야! 어때? 스스로의 생각에 감탄이라도 한 듯 몸을 흐느적거리는 뼈대를 보고 있으려니 연체동물인가, 뇌가 없으니까 맞을지도, 아니 걔넨 작지만 있었던 것 같으니 다른가,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이메리크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좋아서 길거리 괴한 시나리오 정도라면 들켜도 훈계로 끝내고 말 수 있지만 습격감금은 짤없는 재판감, 재수없으면 즉결처분도 가능한 영역인데 이 녀석들은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건가? 애당초 생각이라는 게 있긴 한 건가? 각자 다른 날 태어났지만 한날 한시에 인생을 종치겠단 결의라도 맺은 것마냥 세상 좋게 웃고 있는 셋을 보다 그만 머리가 아파져 에스티니앙은 이마를 짚었다.
그 제안도 결국, 승낙했다. 이 머저리들보단 자신이 맡는 게 백 번 안심이다. 여기서 계획이 더 커져 저 어디 메테오 계획 비슷한 기괴한 것이 되기 전에 끝내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적당히 해치우고 이슈가르드로 돌아가자. 에스티니앙은 까만 두건을 코 아래까지 내려썼다. 묵고 있는 호실을 알아온 건 수탉이었다. 졸고 있는 주인 몰래 숙박부를 뒤져본 것을 창천의 영웅 서사시라도 되는 양 읊고 있는 장엄한 목소리를 뒤로 에스티니앙은 여관을 향했다. 보안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 싸구려 여관이었다. 로비에 앉아 선잠을 자고 있던 주인은 힐긋 이쪽을 보았다가,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모습에 곧 눈을 떼고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발로 차면 부서질 것 같은 문은 노크했을 뿐인데 삐그덕, 소리를 내더니 툭 하고 혼자 밀려 열렸다. 혹시나 했던 호위도 역시나 없다. 질기다 못해 핵 아니냔 평가를 받는 것이 아이메리크의 명줄이었지만 이쯤 되면 안전불감증이다. 적도 많은 높으신 분이 왜 이러고 다니는 걸까. 에스티니앙은 침대의 머리맡에 앉았다.
깨라, 좀. 마음 속으로 말을 누르며 에스티니앙은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벌 옷도 가져오지 않은 듯 공단 셔츠를 그대로 입은 채, 외투만을 걸어 두고 세상 좋게 깊이 잠든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하, 하고 한숨이 나왔던 것이다. 이불보 위론 익숙한 검의 손잡이가 툭 삐져나와 있었다. 누가 들어와도 깨지도 못하면서 검은 왜 옆에 두고 자는 건까. 자결용인가. 잠결에 뒹굴다가 지가 찔리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 그냥, 그 얼굴을 보고 있었다. 있었던 것 같다.
별로 대단한 건 하지 않았다. 그냥 자는 얼굴을 보고 있었던 것뿐이다. 병사 시절에는 사실 누군가와 침대를 같이 쓰는 것 정도는 일상이었다. 어디나 물자가 모자랐고, 원정이라도 가면 침낭 하나에 둘이 몸을 포개어 잠드는 일도 잦았다. 아이메리크와도 같은 침대에서 몸을 붙이고 곯아떨어진 게 수십 번이지만 감정을 자각한 뒤로는 하지 못하게 되었다. 최대한 혼자 잤고, 안 될 때는 다른 놈이 차지한 침대에서 그 등짝을 밀어 한쪽으로 치우고 잤고, 가끔 잘 곳이 없다며 아이메리크가 해사하게 웃으며 침대로 비집고 들어오는 날이면, 그런 날이면 어쨌더라. 어쨌든 잠을 자는 건 포기해야 했다. 같은 마음도 아니면서, 아닐 게 뻔하면서 눈치없이 치대는 통에 몇 번이고 이마를 짚었던 기억이 난다. 곧 둘 다 남의 침대에 몸을 덧대 잠을 청해야 할 위치는 벗어나게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래서 그냥 자는 얼굴을 구경했을 뿐이다. 볼 기회도 없었으니까,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이럴 때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갑자기 눈을 툭 떠서 자신을 보고 당황한대도 문제없다. 명분이 있다. 밖에 머저리 용병대가 있는데 그 녀석들이 어 웃기는 계획을 짜서 이렇게 됐다, 하고 말하면 될 일이다. 그 녀석들이 이제 여기 들이닥칠거란 말야 널 구하겠다고, 하고 웃으면 아이메리크도 아마 따라 웃…을… 것… 이다. 잊고 있었다. 그 놈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곧 여기 쳐들어올 머저리 용병대의 존재를 말이다. 에스티니앙은 급히 몸을 돌렸다.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서서, 한 손으로 테이블을 짚은 순간 차가운 조각이 손가락에 잡혔다.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돌렸고, 미간을 모으고 손가락 끄트머리에 걸린 조각을 바라보았다. 납작한 금속 파편의 한편은 서늘하게 날이 서 있었고, 반대쪽은 깨지기라도 했는지 부서진 안쪽이 드러난 채였다. 본디 매끈했을 검은 표면은 자잘한 상처들로 훼손되어 있었다. 손바닥만한 파편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창이다. 정확히는, 자신의 창이었던 날의 일부. 순간 머리를 스치는 어떤 의문이 있었다.
이 녀석 왜, 여기에 있지?
그러고 보니 왜 여기에 있지? 그제야 새삼스러운 의문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총장의 구체적인 스케줄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이런 구석에 혼자 떠나와 처박혀있을 이유는 없다. 외출이래봤자 기껏해야 타국 출장이나 근방 커르다스 순찰 정도가 전부인 녀석이다. 그런 일정이라도 예의상의 호위는 달고 있는 게 기본이었고, 사복을 입고 있을 일도 혼자 이런 곰팡내 나는 여관에 머무를 일도 없다. 에스티니앙은 손에 쥐고 있는 까만 조각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거 혹시. 날 찾으러 온 건가.
생각해 보니 그랬다. 교황청에서 포기한 인재란 소릴 들을 정도로 행적이 유명한 탓에 며칠 없어진다고 자신을 찾는 사람은 없었지만, 여관방에 용기사의 특징적인 갑옷만 허물마냥 남긴 채 돌아오지 않는 손님이 있었다면 용기사단에 연락이 닿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소수부대다. 남자에 키는 이 정도인 사람, 하고 인원 좀 맞춰 보면 누구의 갑옷인지는 견적이 나온다. 푸른 용기사의 실종이라고 판단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조사대가 파견되었을 것이고, 근방에서 있었던 큰 눈사태와 맞물려 사고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쌓인 눈 가운데서 부러진 창을 찾아냈을 테고…. 사고는 자석처럼 척척 이어졌다. 수색을 해도 성과는 없었을 것이다. 시체도 살아있단 증거도 찾지 못했겠지. 이것이 푸른 용기사의 유품인 것 같습니다, 하고 들고 온 까만 창조각을 본 아이메리크가 아마…. 에스티니앙은 물끄러미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유독 곤히 잠든 얼굴과 답지않게 헝클어진 머리카락, 구겨진 옷과 망토 같은 것을 바라보며 두 번 더 사고의 흐름을 정리해 보았지만 모든 사고는 직육면체의 타일마냥 들어맞았다. 에스티니앙은 결국 이마를 짚었다.
"네 사람 헷갈리게 하는 짓거리 때문에 도저히 피곤해서 못 살겠다."
목소리는 탁 터지듯 흘러나왔다. 비집고 왔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목소리가 대기에 녹아 사라지자마자 쿨쿨 규칙적인 숨소리가 빈 침묵을 차지했다. 잠든 몸은 미동조차 없었다. 왜 이렇게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걸까, 어차피 같은 마음도 아니면서, 그만 차라리 편해지고 싶은데 말은 못 하겠으니 네가 이제 눈치란 걸 좀 채면 안되겠냐. 그보다 지금 이 상황을 좀 눈치를 챘으면, 세살배기 아기도 같이 자던 보모가 일어나면 운다던데 이건 그보다 못한 거 아닌가, 쫄 소환하는 능력도 없는 것 같은데 뭘 믿고 혼자 이러고 다니는지, 괜히 이러니까…. 목 아래에서 간질간질 기포마냥 터지던 생각의 방울들을 에스티니앙은 다시 마음 한구석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결과적으로 남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했군. 머저리력이 옮았나.
5.
등장할 타이밍을 보듯 문 밖에 일렬로 서 있던 녀석들에게 방 안쪽을 까닥이며 에스티니앙은 눈썹을 내렸다. -습격하는 시늉만 할 생각이었는데 저항이 거세서 그만. 어떡하지? 죽었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백해진 얼굴로 셋은 비명조차 없이 줄행랑을 쳤다. 확인하는 녀석이 어떻게 한 놈도 없냐. 에스티니앙은 한숨을 쉬고 뒤척임조차 없이 곧은 자세로 자고 있는 몸을 힐끗 쳐다보았다가 가만히 문을 닫았다. 머저리 용병대와 함께 자신을 날라 주었던 마차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이슈가르드로 가 줘.
까만 하늘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수탉이든 개든 당나귀든, 다시 만날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뭐. 에스티니앙은 마차의 문짝에 고개를 기댔다. 답없는 녀석들이었지만 글쎄, 적어도 모든 걸 내보일 수 있는 그 솔직함만은 배울 점으로 쳐 줘야겠지. 언젠가는 닮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잊혀진 흔적처럼 쿡쿡, 작게 쑤시기 시작한 왼발을 비벼 내려놓으며 에스티니앙은 눈을 감았다.
꿈에는 네 마리의 동물이 나왔다. 악보를 들고 꽥꽥 소리를 지르는 수탉과 두 발을 들고 춤을 추는 당나귀, 지휘봉을 거꾸로 쥐고 멍청한 얼굴로 꼬리를 흔드는 개와, 멀찍이 떨어져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는 고양이가 일렬 횡대를 이루고 서 영원 같은 행진을 하고 있었다.
브레멘 용병대의 닷새간
2017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