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연인이 된 계기의 쪽팔림이 새삼 대단한 부분에 대하여
-붉은전갈단 두목(43, 휴런).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연애는 쪽팔린 계기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두목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술먹고 링크펄로 고백을 했다느니, 내 친구 누구는 공개 프로포즈 이벤트를 했다느니 하는 부하들의 잡담을 듣고 있자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부끄러운 일 하나 없이 시작하는 연애 같은 게 있을 것 같냐. 로맨틱한 고백이니 운명적인 만남이니 하는 건 상상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고, 아무튼 연애란 건 대부분 창피한 사건으로 시작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지금 이 순간도 어디선가 쪽팔린 계기로 연애를 시작하는 커플이 있을 거라고. 대충 그런 말들을 마음속으로 늘어놓고 있으려니 중년의 부하가 스르륵 다가와 생각을 끊었던 것이다.
“큰일났어요, 두목.”
뭐야? 고개를 돌리자 부하는 큰 체구를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에 말단으로 들어온 새끼가 좀 심각한 걸 주워왔다고요.”
“뭔데, 시체라도 주워왔냐.”
시체 같은 게 아니에요. 아무튼…. 부하는 한숨을 뱉었다.
말단은 처음부터 싹이 보이는 녀석이었다. 두목은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의를 줬다. 우리는 약소 도적단이다. 알겠냐? 절대 신궁부대 놈들이랑 엮일 일 만들지 마. 그냥 돈만 뺏어. 다치게 하지도 말고, 특히 납치는 절대로 안 돼. 빽 있는 놈들은 아예 스치지도 말라고. 당장 지난주에도 잔소리를 했는데…. 두목은 이마를 짚었다. 젊은 놈들이 한탕욕심이 있는 건 알고 있지만, 말단은 개중에서도 혈기가 넘쳤다. 언젠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싶긴 했지. 부하는 몸을 낮췄다.
“큰 건수 올렸다며, 웬 남자를 짊어지고 왔어요.”
부하의 이야기는 이랬다. 말단이 갑자기 웬 남자를 짊어지고 기지로 들어왔다. 남자는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져 있었고, 단단해 보이는 투구가 어그러지고 깨져 그 틈새로 피가 엉긴 하얀 머리카락이 들여다보이는 상태였다고 한다. 남자가 입고 있는 갑옷은 그리다니아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었다. 타지의 떠돌이 모험가인가…? 뭐야, 저 남자는…? 말이 되지 못한 추측들이 공기에 구름처럼 자욱하게 떠도는 사이 말단이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이거, 이슈가르드의 기사입니다. 이 갑주 틀림없습니다. 이슈가르드에서 용을 주력으로 잡는 날고 기는 놈들이 입는 그거에요. 말단은 자못 자랑스럽기까지 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고 한다. 대부분 귀족이라고 들었습니다. 귀족이 아니어도 어느 정도 돈은 있겠죠.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 이슈가르드의 귀족씩이나 되는 사람을 인질로 잡고 돈을 요구하자고 잡아온 거야? 두목은 띵해지는 머리를 짚었다. 일이 커지니까 납치는 하지 말라고 매일매일 얘기한 결과가 이거라니. 부하는 몸을 가까이 붙였다. 두목. 게다가 이슈가르드 근방에서 잠깐 일했던 녀석 이야기를 들으니 그냥 기사도 아닌 모양입니다. 부하는 살짝 미간을 모았다. 그 집단, 뭐라더라…. 하여튼 거기에서도 우두머리격인 푸른 용기사라고 하는데요. 두목은 머리를 치켜들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왜 푸른 용기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우리같은 양아치 잡배들한테 납치를 당하냐고…? 그 사람도 좀….”
“커르다스에 쓰러져 있는 걸 그냥 주워오기만 한 모양입니다. 말단 녀석은 푸른 용기사든 뭐든, 얼마나 강하든 잡혀온 이상 뭘 하겠냐고 말하고 있는 모양인데….”
“개인이 강하고 말고의 문제 같은 게 아니잖아! 푸른 용기사라면 이슈가르드의 국가중책이라고! 무슨 일 생겼다간 나라 차원의 대응이 있을 거 아냐!”
우리 같은 일개 도적단이 한 나라 군대랑 붙어봐라! 분쇄기에 돌린 얼음마냥 형체도 못 찾고….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듯 말을 뱉은 두목은 이윽고 이마를 잡고 털석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떡할까요, 두목. 부하는 몸을 낮췄다.
“아직 정신 잃고 있는 상태인 거지? 그럼, 다시 들어다 밖에 던져 놓으라고 해.”
“커르다스 쪽 길목으로 말입니까?”
“그-래 아니다, 길바닥에서 죽어도 휘말릴지 몰라. 사람들 많이 다니는 길목 쪽이 좋겠다. 누군가 발견하겠지. 그, 채석공방 가는 쪽.”
채석공방. 본인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두목은 다시 까마득한 한숨을 쉬었다. 더 외진 곳이 좋다는 부하들의 반대와 우려에도 채석공방 근처에 지하 기지를 만든 것은 오로지 자신의 취향 때문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대의 책이나 몇몇 모험가의 입소문을 통해서만 드문드문 전해져 오는 어떤 장소에의 매료 때문이었다. 그 장소에 대한 글과 그림을 구하기 위해 각지를 뛰어다녔고, 정당한 방법으로든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든 모은 돈은 전부 그 장소와 똑같은 기지를 만드는 데 들이부었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자신의 공간이 바로 그 기지였다.
거길 꾸미는 데만 몇 백만 길이 들었는데…. 두목은 까마득한 한숨을 뱉으며 얼굴을 문질렀다. 혹시라도 상하기라도 하면. 정말로, 진짜, 그럴 리 없겠지만, 부서지기라도 하면 말이야…. 잔뜩 꺼져드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되뇌는 두목을 부하는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이었다.
-푸른 용기사(32, 엘레젠, 남).
에스티니앙은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가 똑바로 잡힐 때까지 하나, 둘, 셋넷다섯을 세고 가만히 기다렸지만 시야는 또렷해지지 않았다. 한 겹 막을 씌워 놓은 것처럼 흐릿한 시계는 눈을 몇 번 감았다 떠도 똑같았다. 머리를 휙휙 젓고 투구를 벗어 내려놓은 후 에스티니앙은 천천히 주먹을 쥐어 보았다. 감각이 둔하다. 손가락도 팔도 조금씩 움직여 보는 다리도 영 원래의 감각이 돌아오지 않는다. 에스티니앙은 그냥, 일어나기로 했다.
아도넬 점성대 근방까지 내려갔다가 돌아오던 중 커르다스 끄트머리에서 에이비스 졸개를 발견해 점프를 내리꽂았던 것까지는 확실하게 기억한다. 혼자인 줄 알았더니 가까이에 떼가 있었는지 한쪽 하늘이 새까맣게 변했던 것도 기억한다. 좋다 이거야, 창을 고쳐 쥐고 한참 그 몸통과 모가지를 찢던 와중 무리 중 한 녀석의 발톱인지 부리인지에 머리를 세게 맞은 것까지도 기억한다. 조금 비틀거렸고, 뒤를 돌아보았고,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이 정도는 아마, 점프해 착지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던 것, 착지하지 못해 죽는대도 용 졸개의 먹잇감으로 죽는 것보다는 나을 거란 생각이 스쳤던 찰나와 마지막 힘을 짜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순간들이 전날의 꿈처럼 희미하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마지막 점프가 어떻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머리를 맞은 이후로는 기억이 희미하다. -하지만 별로 기억나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 이 풍경을 보면 알 수 있으니까. 에스티니앙은 주변을 둘러보던 눈을 정면에 고정했다.
빨갛다.
새빨갛다. 온통이다. 전부 빨갛다. 벽돌과 진흙으로 얼기설기 쌓아진 벽이 네모난 방을 이루고 있고, 두 갈래의 좁은 통로가 다른 방으로 이어져 있다. 축축하게 젖은 흙과 자갈이 바닥을 엉성하게 덮고 있다. 어두운 붉은색이 도는 바닥 한가운데에는 동그란 문양이 새빨갛게 수놓아져 있다. 짙은 붉은색의 공간 가득, 흐릿한 안개가 시간이 멈춘 듯 가라앉아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스스로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넘겼다. 이곳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다. 죽은 자들의 공간, 혼령이 떠도는 세계,
망자의 궁전.
-붉은전갈단 말단(22, 휴런).
말단은 침착했다. 정확히는, 침착해졌다. 이런 상황을 마주한다면 아마 누구라도 침착해질 것이다.
불과 십 분 전까지는 숨을 씩씩거리고 있었다. 말이 돼? 기껏 잡은 걸 왜 다시 놓아줘야 하냐고. 국가 차원의 대응이니 뭐니, 뭘 모르는 소리라느니 어린애의 치기라느니 뭐니…. 한탕 해서 나가겠다는 의지로, 자길 무시하던 놈들 보란 듯 떵떵거리고 살아주겠다고 이 기분나쁜 기지도 참고 일한 게 벌써 다섯 달이라고! 모험가 돈이나 뺏어서 대체 언제 집 사고 떵떵거리고 살겠냐고! 진짜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때려치우고 좀 제대로 된 도적단에 들어가야지. 그런 생각을 했다. -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런 건 아무래도 됐다.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아마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말단은 붉은 돌바닥을 턱턱 밟았다.
이 기지는 두목이 삼 년 전쯤에 만들었다고 한다. 죽은 자들의 영혼이 떠돈다는 망자의 궁전이라는 장소에 당시 두목은 엄청난 매력을 느꼈다는 모양이다. 온 에오르제아를 뒤지며 정보를 찾아서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한 거라고, 안개 속에서 빨간 돌벽을 톡톡 두드리며 말하던 두목의 얼굴은 자부 그 자체였다. 있는 돈 없는 돈 퍼부어 재현한 건 좋은데, 적어도 기지로는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됐고. 울퉁불퉁한 바닥에 발을 비비며 말단은 방 안으로 빼꼼 시선을 돌렸다.
방 한가운데 앉아 있는 남자는 어깨를 한껏 들어올렸다가 한숨을 뱉었다. 네 번째다. 한숨을 쉬고 싶은 건 이쪽이라고. 짊어지고 왔던 남자를 다시 내다놓으라는 두목의 명령에 툴툴거리며 돌아왔더니 이미 남자는 깨어나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한참 동안이었다. 아주아주 한참 동안이었다. 간혹 고개를 까닥거리거나 손가락을 펴 보거나 하다 다시 가만히 서 있을 뿐이라 저거 약간 그건가, 랙걸린건가, 어떡하지, 일단 내보내긴 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역시 저거 약간 그건가 랙걸린건가, 를 세 번쯤 반복했을 때에야 남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던 것이다.
“젠장…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
갑자기 터진 남자의 목소리에 말단은 놀라 어깨를 흠칫했다. 남자도 놀라 몸을 흠칫했다. 당사자는 대체 왜 놀라는 건가 싶었지만 말단 자신보다 더 놀란 듯 남자는 눈을 깜박거리다 몇 번이나 아, 아아 뭐야 목소리 나오는 건가, 하고 벙찐 말을 뱉어냈다. 뭐 병이라도 있었던 건가. 푸른 용기사가 실어증이라는 말은 못 들었는데. 눈썹을 늘어뜨리고 방 안을 엿보는 말단의 존재는 눈치채지 못한 듯 남자는 슥슥 주변을 둘러보다 이윽고 방 가운데 털썩 주저앉았다.
“…여길 계속 떠돌아다녀야 한다고? 망할. 그냥 성불 좀 하자.”
남자는 토하듯 말을 뱉었고, 말단은 그 순간에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남자가 큰 오해를 하고 있다는 상황 말이다. 그게 그럴 만도 하지 여기가 이렇게 생겨서, 그치 갑자기 눈떴더니 다른 장소에 와있고 게다가 이렇게 생겼고 그러니까, 아니, 근데 아니거든요 지금 잘 살아 계시고…. 자신도 모르게 방으로 몸을 옮기던 말단은 갑자기 벌떡 일어난 남자를 보고 다시 등을 돌려 통로에 몸을 숨겼다.
그게 십 분 전 일이다. 어떻게 하면 좋지? 말단은 이마를 닦았다. 그냥 들어서 밖에 던질 생각이었는데 이미 깬 데다가, 자기가 죽은 걸로 착각하고 있다고. 뭐 어떻게 하란 거야. 애꿎은 개구리 모양의 새빨간 문양을 발로 몇 번이나 비비며 말단은 속으로 꾸역꾸역 생각을 삼켰다. -뭐 좋다. 기껏해야 착각하고 있을 뿐이잖아. 곧 자신이 틀렸단 걸 알아챌 테고, 그럼 알아서 나가겠지. 좋아. 됐네. 말단의 긍정적인 사고는 아무래도 좋은 듯 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고, 어깨를 들썩이더니 주먹을 꽈악 쥐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고백이라도 할 걸.”
말단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보이지 않겠지만 저었다. 이 강한 부정의 뜻이 통로를 건너 남자에게 닿기를 바라는 느낌으로 저었다. 남자와 사적인 친분은 조금도 없지만, 조언을 줄 의리도 뭣도 없지만 이것만큼은 아니다. 지금 고백 비슷한 거라도 되뇌었다간 최소 삼 년은 부끄러울 거라고. 당신이 부끄럽지 많아도 내가 부끄럽게 된다고. 말단의 간절한 마음은 아무래도 상관없는지 남자는 흡, 숨을 들이마셨다.
“아이메리크….”
아. 말해 버렸다. 이름만 들었는데도 어쩐지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느낌에 말단은 얼굴을 감쌌다. 아이메리크,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머리를 굴리면 누군지 떠오를 것 같지만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게 남자에게 지켜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의리일 것이다. 말단은 휙휙 고개를 털어 뭉게뭉게 떠오르는 얼굴들을 가라앉히며 다시 빼꼼 고개를 내밀어 방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말단은 침을 삼켰다. 안 된다, 이대로는. 이 남자가 더 감성에 젖기 전에 어떻게든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그냥 일반인이나 어린애면 달려가 뒤통수나 쳐서 기절시키고 질질 끌고나가면 될 일이지만 상대는 이슈가르드의 푸른 용기사다. 다소 부상을 입었다 해도 자기가 덤벼볼 상대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웃으며 달려나가 서프라이즈 성공 깃발이라도 흔들며 폭죽 터트릴 수도 없는 일이고, 솔직히 말할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고, 어떤 식으로든 자기가 이 남자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순간 이번엔 자기가 살아서 돌아갈 수가 없을 것 같단 말이다. 어떻게… 어떻게. 말단은 머리를 굴렸고, 결국 어떤 영감을 얻어냈다. 번뜩! 말단은 반짝 웃으며 손가락을 쳐들었다.
이 지하기지는 한 층 더 아래가 있다. 손바닥만한 제어실 하나가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기지의 조명을 조절하거나 투영장치로 기지를 감시하거나 하는 작은 방이다. 물론 실제 망자의 궁전에 존재한다는 전송장치같은 대단한 기술로 이동하는 건 아니다. 끄트머리 방의 벽 스위치를 움직이면 바닥을 가리고 있던 깔개가 움직여 작은 통로가 드러나는 원시적인 식이다. 아무래도 좋다. 제어실에서는 지상으로 통하는 비상용 문을 열 수가 있다. 문을 열면 밤에도 반짝반짝 하얀 별빛이 흘러드는 이 어두운 기지에, 지금 시간은 마침 절호조의 한낮이란 말이다. 신이 돕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쨍쨍한 햇볕이 그득한 맑은 날씨다. 역시 신의 도움이다. 감사합니다! 전쟁신 할로네시ㅇ… 아니, 불길하다. 역시 신 따위는 됐다. 제어실에서 문을 개방하면 노랗고 확연한 빛이 쨍 기지 전체에 넘실넘실 들어찰 것이고, 남자는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따라 걷기 시작할 터다. 그리고 출구로 나가 울창한 검은장막 숲을 휙휙 살피곤 아, 뭐야 가짜였나 젠장, 쪽팔린 소리나 했네, 하고 머리를 긁다 북쪽으로 걸음을 옮길 것이다. 남자도 자신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대신 잃는 것도 없이, 잠시 비웠던 자신의 장소로 돌아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상 유지였다.
한 가지 작은 문제는, 제어실과 연결된 방은 남자가 있는 방을 가로질러야만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뭐 됐어. 말단은 귀에 찬 링크펄에 손을 올렸다.
-다시, 푸른 용기사(32, 엘레젠, 남).
좋아했던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건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사실은-,
아주 옛날부터 상관없는 일이었다. 조용한 마음이었다. 반짝반짝 하얀 별빛이 흐르는 까만 밤처럼, 샛노란 햇볕이 넘실넘실 흐르는 백색의 낮처럼 조용히 좋아했다. 그뿐이었다. 욕심을 낸 적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별로 어떻게 해 버리겠다든지 억지로라도 내 것으로 만들겠다든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사람과 평생을 약속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현상 유지가 하고 싶었다. 에스티니앙, 하고 부르는 그 목소리를 좋아했다. 목소리에 묻어 있는 미소의 파편 같은 것이나, 흩어지는 목소리의 낟알 같은 것을 좋아했다. 에스티니앙, 하고 붕 떠올랐다가 착 가라앉는 목소리를 몇 번이고 듣고 있을 때면 이대로 수백 개의 밤과 수천 개의 낮, 일억 이천 개의 시간들 사이에 이 목소리를 가만히 가만히 채워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냥,
그뿐이었다. -뭐어.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털었다. 누군가는 현상 유지 같은 건 비겁하다 말할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각자가 각자의 길을 떠나 각자의 삶을 살다 마치는 동안 서로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한 명이었다면 그걸로 족했다. -이제 와선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말이지. 일단 이렇게, 죽어 버렸잖아. 에스티니앙은 끙 소리를 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만히 있어도 별 수 없다고 붉은 통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 건 좋았는데, 걸을수록 몸이 쑤신다. 왜 죽어서까지 몸이 쑤셔야 하냐고. 에스티니앙은 자신의 손과 발, 몸 이곳저곳을 훑어본 뒤 다시 한숨을 쉬었다. 젠장…. 역시 시야도 흐리다. 육체에서 벗어났으니 오히려 시력은 좋아져야 하는 거 아닌가? 여전히 머리도 아프다. 벽 같은 걸 통과할 수도 없는 것 같고, 몸에서 빛도 안 나고, 부드럽게 웃으며 세상을 축복해 줄 마음도 안 들고, 용서하는 마음 같은 건 더더욱 안 들고, 내가 이렇게 됐으니 아이메리크는 좋은 사람 만나서 언약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같은 생각은 어떡하지, 진심으로 요만큼도 안 드는데. 게다가 기분 탓인가 배도 고프다. 사후가 이런 세계였다니. 그냥 죽으면 에테르로 휙 돌아가는 줄 알았지. 왜 아무도 안 가르쳐 준 거야. 망할. 에스티니앙은 벽에 등을 기댔다.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자. 에스티니앙은 숨을 후, 길게 들이마셨다. 그래. 에테르로 돌아가는 것도 개체차가 조금씩 있는 거겠지. 아마 곧 화아, 하고 흰 빛에 감싸여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 남아있는 동안 기록 같은 걸 남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 유서 같은 거. 에스티니앙은 주섬주섬 까만 펜을 꺼내 쥐었다. 아까 이 망자의 궁전을 돌아다니는 동안 복도에서 주웠던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장소의 물건이군. 에스티니앙은 씁쓸하게 웃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어리버리한 인간이 허둥지둥하다 실수로 툭 떨구고 가버린 마냥 놓여있었지만 그럴 리는 없다. 아마 자신처럼 망령이 되어 이곳을 떠돌았던 학자의 마지막 유품이겠지. 어쩐지 아련한 기분이 되어 수습했던 그것을 손에 쥐고 에스티니앙은 몸을 일으켰다.
종이는 없다. 가만. 아까 어떤 방에 하얗고 매끄러운 항아리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래. 거기다 남기면 되겠군. 망자의 자신의 기록이 누군가에게 읽힐 일은 없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남길 수 있는 글인 것이다. 에스티니앙은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붉은전갈단 제어실 관리원(30, 라라펠).
제어실 관리는 교대 같은 게 없다. 혼자서 하루 종일 24시간 내내 기지를 살피는 게 관리원의 일이다. 혼자라니, 하루 종일이라니 몸 망가지겠며 경악하는 녀석들도 있지만 딱히 그럴 것도 없다. 혼자서 관리가 가능한 이유는 단순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심한 도적 놈들이 몇 명 모인다고 대단한 어둠의 조직이 되지 않는데다가, 신궁부대니 쌍사당이니 하는 분들도 우리같이 돈을 털긴커녕 되려 털리고 다니는 놈들 천지인 조잡한 도적단 찾아다닐 한가한 처지가 아니다 보니 하루하루 별다른 일이 생기질 않는 것이다. 감시장치에 비치는 얼굴도 매번 그 놈이 그 놈이다. 가끔은 지겨울 정도로 그 놈이 그 놈이다. 지하다보니 벌레나 두더지 같은 게 가끔 들어오는 것 정도가 이벤트라면 이벤트인 이 바닥이다. 그런데….
저 남자는 뭐지? 관리원은 머리를 긁었다. 기지 군데군데 설치된 투영장치의 영상을 비추는 화면 구석에 어떤 남자가 비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기지는 싹 빈 채인데다가, 웬 낯선 남자가 기지 한가운데의 방에 앉아 있는 것이다. 날카로운 갑옷과 벗어 안고 있는 금이 간 투구, 꽉 모은 미간. 신규 조직원… 은 아마 아닐 것이다. 이런 변두리 도적 잡배질이나 할 분위기의 인물이 아니다. 푸크떼나 뛰어다니는 중부삼림 개울가에 설원 철거인이 앉아 있는 수준의 위화감에 관리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뭐, 별 일 아니겠지. 삼 년간 별일없던 조직이 뭐 갑자기 큰일이라도 생기겠어. 관리원은 낙천적인 성격이었고, 좀 더 눈을 붙이기로 했다.
관리원이 눈을 떴을 때 남자는 부활 석탑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부활 석탑 모양의 조형물이다. 백금 광석과 점토로 만든 것으로, 울다하의 세공사에게 의뢰료를 두둑이 쳐주고 받았다고 한…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됐고. 뭐 하는 거지? 관리원은 미간을 한껏 모았다. 석탑을 빤히 바라보던 남자는 주섬주섬 펜을 꺼내들더니 갑자기 부활 석탑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야! 순간 관리실에서 뛰쳐나갈 뻔한 관리원은 이성을 다잡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전투능력이 전무한 자신이 저렇게 무지막지해 보이는 갑옷까지 입은 전사와 잘못 시비라도 붙었다간 큰일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정신이 살짝 이상한 사람이라거나 하면 정말로 큰일이다. 일단 뭐라고 쓰는지나 보자. 관리원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여기 유서를 남긴다. 아무도 보지 못하겠지만.
큰일이다. 역시 살짝 이상한 사람이다. 관리원은 깊은 절망을 느꼈다. 삼 년간 두더지 쪼가리나 드나들던 이런 기지에 어째서 재해같이 이런 이상한 남자가 찾아온 건지. 그것도 보통 이상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아니 잠깐. 남자의 글은 문자 그대로의 유서란 뜻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했다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우리 도적단에의 선전포고일 수도 있다. 좋아. 이마를 문지르던 관리원은 눈에 힘을 주고 다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한 번만 더 너를 만나고 싶어.
큰일이다. 역시 이상한 사람이다. 관리원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떡하지? 아냐. 이건 혹시, 내가 보고 있단 걸 알고 나에게 뭔가 메시지를 전하는…. 관리원은 다시 화면을 휙 바라보았다.
비록 네 눈엔 내가 보이지 않겠지만,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너를 껴안고 싶다.
큰일이다. 역시 정말 진심 전력의 이상한 사람이다. 어떡하면 좋지? 탱자탱자 기지나 감시하고 가끔 회계일이나 돕는 자신에게 갑자기 이런 재난이라니 너무하지 않나. 도적단이라 해도 각각 다른 녀석들이 있다고. 모험가도 그 왜 야만신 토벌도 신나서 하는 모험가들도 있지만, 물고기나 낚으면서 집에 화분이나 놓는 낙으로 살고 있는 모험가도 있잖아. 난 후자 쪽이라고. 저런 남자 감당 못 한다고. 관리원은 힘겹게 아무데나 던져 둔 링크펄을 찾아 끼었다.
“…대체 왜 이제서야 받는 거야!”
링크펄을 끼자마자 저편에서 새된 목소리가 울렸다. 이 목소리는 말단이다. -뭐야? 대답하자 말단은 한숨을 푹 뱉었다.
“-아까부터 연락했다고. 아무튼 지금 당장 기지 문 좀 열어 줘.”
“대체 뭔데. 아, 그보다 기지 안에 이상한 남자가 있는데….”
“그 남자 때문에 그러는 거야! 설명은 나중에 할게! 아무튼 문 열어주면 나갈 테니까, 빨리 문 열어 줘.”
관리원은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전송 석탑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시야가 흐리다. 머리도 아프고, 팔다리도 저려. 이제 곧 사라질 때가 된 거겠지. 아이메리크, 마지막으로-…. 관리원은 남자가 쓰고 있는 글씨에서 눈을 돌렸다. 침을 한번 꿀꺽 삼켰고, 후 하고 한숨을 뱉었다. -좋아. 열게. 관리원은 의자에 쫑 뛰어올라 해치를 열고 레버를 당겼다.
끼기기기긱…. 몇 얄름 위에서 희미한 소리가 울렸다.
-신전기사단 검술부대 막내(20, 엘레젠).
새로 취임한 젊은 총장은 기사단 내에서도 호불호가 갈린다. 좋다는 사람이 반, 싫다는 사람이 반, 그리고 그 사이에 아무래도 상관없단 사람들이 크래커 사이의 크림마냥 얇게 끼어 있는 형태다. 막내는 아무래도 상관없단 쪽이었다. 별로 싫지도 않고 좋지도 않고 아-, 뭐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편이다. 일도 잘 하는 것 같고, 인간적인 부분에서도 호감을 느끼고 있다. 그뿐이다. 괜히 나서 지지한다 말할 필요성도 못 느끼겠고, 싫어한다는 사람들 앞에서 굳이 피곤하게 논쟁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다. 싫다는 선배 앞에서도 응원한단 선배 앞에서도 맞습니다, 그분 좀 그렇더군요 하고 끄덕거리며 주말에 집에 돌아가 발 뻗고 잘 생각이나 하는 게 전부다.
그냥 딱, 그뿐이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네…. 막내는 다리를 바꿔 꼬았다. 말단 중에서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막내가 총장과 함께 움직인 적이라곤 기사단 전체가 움직이는 모의 훈련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때도 보긴 했지, 저 멀리 파란 점으로 보였지만. 막내는 나무에 기대어 섰다. 아무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일은 없었다. 아마 이 사건만 아니었더라면, 앞으로도 영원히 없었을 것이다.
푸른 용기사가 실종되었다. 정확히는, 사흘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얼핏 듣기엔 나라가 뒤집어질 대사건이지만 기사단 내부에서는 그 사람이 사흘 연락 안 되는 걸 가지고 왜 이 난리냔 의견이 중론이었다. 아무튼 현 푸른 용기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게 총장씩이나 되는 양반이 정규 병력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몇 안 되는 떨거지 병사들, 즉 나를 포함한- 을 옹기종기 데리고 이 그리다니아까지 나온 이유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 누구더라, 여하튼 재수없는 명문가 자제님에게 쪼이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의 연장일 것이다. -납치 가능성이라니 그것 참, 친구를 생각하시는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거들먹거리는 목소리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솔직히 이러셔도 정치적인 쇼란 말밖에 못 들으십니다.”
“날 싫어하는 사람이 뭐라 하든 상관없다. 게다가 그가 마지막으로 전투했던 현장에 있던 에이비스들은 독도 있다고 알려ㅈ….”
“독이래봤자 약하잖습니까! 그냥 시야 좀 흐리고, 머리 좀 아프고! 팔다리 좀 저리고 그러다 마는 겁니다만! 에스티니앙 공이 그런 독으로 납치당해 탈출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총장은 입을 다물었다. 과연 이 부분에서는 총장도 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다. 출발할 때부터 병사들도 삼삼오오 수군거리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진심이냐. 그 사람이 사흘 연락 안 됐단 이유로 수색을 나서면 일 년에 백이십 번은 나가야 된다고. 유목민족도 아니고. 그 사람, 독 브레스 몇 중첩씩 맞고도 걸어서 돌아왔잖아. 술렁대던 병사들은 이윽고 천천히 조용해졌다. 총장은 미간을 모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무튼 이 근방에서 다친 그를 목격했다는 사람이 있는 이상 수색을 하진 않을 수는 없네. 그는 내 벗이기 이전에 국가 중책이다. 신전기사단에서 수색을 담당하는 것은 당연하지.”
“함정일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게다가 그 목격 증언이란 것도 푸른 용기사를 확실히 지칭한 건 아니었죠? 이슈가르드의 용기사 갑주를 입은 긴 하얀 머리카락의 엘레젠 청년이 질질 끌려가는 걸 보았다는 것뿐이었잖습니까?”
“에스티니앙밖에 더 있나.”
이번엔 명문가 자제의 말문이 막힐 차례였다. 1:1인가. 흥미진진하네. 막내는 다리를 다시 바꿔 꼬았다. 최종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다른 신전기사단의 병사들도 막내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듯 다들 입을 다문 채 흥미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관전하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총장이었다. -나도 그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다. 명문가 자제 녀석이 한숨을 쉬었다.
“아이메리크 경. 그 도적단… 아 뭐더라, 이름이… 삶은가재단?”
“삶은가재단은 아니었던 것 같군. 붉은… 붉은대게단….”
아…. 맞습니다.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군요. 둘은 마주본 채 잠시 고개를 쫑쫑 끄덕였다.
“아무튼! 그 해물상회 같은 일개 도적단에 에스티니앙 공이 붙잡힐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실제로 그가 전투하다 실종된 흔적도 있고, 목격했단 사람도 있네.”
“만약! 정말 만약입니다만, 납치당했대도 이미 자력으로 빠져나왔을 거 아닙니까.”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부상을 입었다든가 구속당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겠지.”
대화는 팽팽했다. 막내는 휘, 하고 작은 휘파람을 불었다. 다른 병사들도 숨을 죽이고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방 현장과 거리가 조금만 더 있었다며 아마 내기판 들고 돌아다니며 팝콘이라도 튀겨 팔았을 것이다. 과연, 승자는 누가 될는지? 정적이 삼 초 정도 휘잉 흘러갔고, 잠시 입을 다물었던 명문가 자제님이 입꼬리를 올리고 씩 웃었다.
“그럼, 이미 죽었을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그 순간이었다. 팽팽하던 공기가 탁 끊어지고 싸늘한 기운의 파편들이 살얼음처럼 얼어붙어 착 내려앉은 그 순간 말이다. 병사 중 누군가 억 소리를 냈다. 정확히는 으워으이익에 가까운 발음의, 주변 사람들까지 같이 놀라 허공에 팔을 휘두르게 만드는 종류의 소리였다. 병사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방향의 땅 속에서, 정확히는 낙엽더미 아래쪽에서 빨간 문이 열리고 있었다. 땅 속 지하를 향해 악어의 입처럼 벌려지는 붉은 통로를 모두 한참 동안 말을 잃고 쳐다보고 있는 동안 퉁, 소리를 내며 문은 고정되었다. 문이 끝까지 열리고도 한참 동안 무리는 정적이었다. -자아, 모두 저기…. 겨우 먼저 정신을 수습하고 입을 연 것은 총장이었지만 곧 그 말도 다른 병사의 외침에 묻히고 말았다.
“저, 저기!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나오고 있었다. 사람이. 허공을 걷는 듯한 걸음걸이로 말이다. 푸, 푸른 용기사다. 뭐, 뭐야… 멀쩡하잖아…. 에스티니앙 공…. 병사들의 술렁임이 잦아들기도 전에 푸른 용기사는 갑자기 휙, 이쪽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푸른 용기사(32, 엘레젠, 남).
…같은 소리만 하고 있지만, 딱 한 번만 너를 껴안고 싶다.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너를 만나고 싶어.
펜을 꾹 누르며 마침표를 찍은 순간이었다. 끼익, 하는 작은 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린 다음 찰나 파 하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빛이었다. 샛노란 빛이 온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순간의 밝은 빛에 시야는 순간 새하얗게 물들었고 네모난 공간은 둥실 백색으로 날아갔다. 일순 시간이 멈춘 것처럼 허공에 화악 떠올랐던 금빛 먼지들이 찬찬히 내려앉고 있었다.
놀랐던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새하얀 땅에 펜을 내려놓았다.
드디어인가. 생각보다 별로 걸리지 않았다. 이제 그만, 에테르로 돌아갈 시간이다. 작은 웃음이 나왔다. 빛에 감싸인 자신의 머리카락과 갑옷, 팔과 다리를 바라보던 에스티니앙은 이윽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빛이 퍼지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던 에스티니앙은 일순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저 멀리, 무언가 보인다. 눈부신 빛에 가려 아른아른거리는 몇 개의 인영들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쏟아지는 빛에 번지는 흐린 시야로도 가운데 단 한 명만은 확실히 분간할 수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입을 벌렸다. 일렁거리는 파란색 옷과 까만 머리카락, 보이지 않아도 완벽히 떠올릴 수 있는 얼굴, 아이메리크.
-아이메리크.
아무래도 자신의 사념도 꽤 깊게 남은 모양이다. 신의 변덕인지 에테르의 섭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결론적으론 고마운 일이다. 이 아이메리크는 실물이 아니라 자신의 사념이 만들어낸 허상일 것이지만 아무래도 좋다. 영혼인 자신이기 때문에, 허상인 아이메리크기 때문에 솔직하게 말할 수가 있다. 에스티니앙은 눈앞의 인영에 팔을 둘렀다.
좋아해.
목소리는 의외로 순식간에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었구나. 허상이라 해도 말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에스티니앙은 눈을 감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품 안에 있는 것은 마치 실재하는 존재처럼 따듯했고, 단단했다. 꽉 감은 눈을 떴을 때 여전히 흐릿한 시야에는 품에 안고 있는 남자의 까만 머리카락과, 멀리 몇 개의 인영들이 비치고 있었다. 자신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하얗고 흐릿한 시야 사이사이 자리잡은 인영들은 술렁이는 듯 이쪽을 가리키는 듯 흔들흔들 움직이고 있었다. 웅성이는 소리 사이로 아이메리크의 목소리를 닮은 무엇인가가 이명처럼 귓가에 새어들었고, 정말로 사라진다는 직감에 에스티니앙은 다시 꽉, 품 안의 허상을 껴안았다. 아직,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손가락에 힘을 주었고, 마지막으로 정말로 좋아했단 끓는 목소리를 뱉었고, 왈칵 눈물이 새어나왔고 이를 악물며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그 등을 끌어안았고,
아주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연인이 된 계기의 쪽팔림이 새삼 대단한 부분에 대하여
20170619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