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메리
뱀메리1
"도대체 왜 그걸 보고 도망가지 않는 건지."
아이메리크는 여태껏 열다섯 번쯤 뱉은 한숨을 다시 푹 뱉어냈다. 멀찍이 의자에 몸을 구기고 앉아 있던 에스티니앙은 천천히 허리를 들었다.
"한숨 좀 그만 쉬어. 그럼 거기서 겁쟁이처럼 도망가냐?"
"당연하지 않나?"
아이메리크는 이쪽을 쳐다보았고, 스스로의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열여섯번째 한숨을 뱉었다.
*
일상이었다. 며칠 죽상이던 녀석이 골치아픈 일이 풀렸다고 간만에 훤한 얼굴로 웃길래 에스티니앙 자신 쪽에서 술이나 한잔 걸칠까냐고 말을 꺼낸 게 시작이었다. -좋지. 아이메리크는 말을 받으며 쾌활하게 웃었다. 주점도 좋지만, 오늘은 편하게 마시고 싶은데. 오랜만에 내 집에 들르겠나? 하는 제안에 이번에는 에스티니앙 스스로가 콜을 외쳤다. 아이메리크의 집에서 일어난 일은 극히 단순했다. 집사 할아범이 내준 저녁을 먹었고, 술을 퍼마셨고, 아이메리크의 방으로 장소를 옮겨 또 퍼마셨고, 취했고, 잤다. 늦었으니 손님방에서 자고 가라는 말을 느릿느릿 탁탁 끊어서 내뱉으며 저 스스로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아이메리크에게 귀찮아, 라고 느릿느릿 탁탁 대답하고 아이메리크의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너는 정말…불평 같은 말을 빵조각처럼 늘어놓던 아이메리크는 결국 꾸물꾸물 옆에 몸을 붙였다. 에스티니앙, 조금만 더 옆으로 가, 좁다…그런 희미한 목소리들이 마지막 기억처럼 남아 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마셨고, 평소라면 잘 일 없는 곳에서 잠들었다. 아무 문제도 없었고, 아무 사건도 없었다. 말하자면,
*
일상이었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눈을 떴을 때는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이었다. 목이 마르다. 머리가 아프다. 좀 더 자고 싶은데, 잠깐 나가서 물만 마시고 다시 누울까, 이렇게 된거 그냥 일어날까, 아니 아예 좀더 잘까…. 그런 생각 몇 개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와중 팔뚝에 묘하게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 것이 비일상의 시작이었다. 맨살에 쇳덩이가 닿을 때와 비슷한 감촉, 차갑고 무겁고, 미끈한… 잠깐, 미끈한? 에스티니앙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팔뚝에 닿아 있던 차갑고 무겁고 미끈한 것의 정체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흰색 이불 사이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까맣고 길다란 것은 어둑어둑한 회색 공기 사이에서도 확연하게 보였다. 새까만 뱀.
뱀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분명 이상한 점들이 많았다. 대체 왜 이 추운 이슈가르드에 뱀이 있는 건지, 집엔 어떻게 들어온 건지, 왜 뱀답지 않게 이런 내팽개쳐진 자세로 잠까지 자고 있는 건지, 대체 아이메리크는 어디로 갔는지. 하지만 당시는 그런 걸 생각할 틈이 없었다. 바로 옆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뱀이 있었고, 자신이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뱀도 스르륵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더이상 다른 걸 생각한 겨를은 없었다. 야성적인 반사신경으로 그 모가지를 콱 틀어잡았고 다른 한 손으로 몸 중간을 꽉 잡아 눌렀다. 뱀은 단말마 같은 소리를 내더니 몸을 버둥거렸고, 그걸 꽉 누른 채 목을 쥔 손에 더 힘을 주기를 삼십 초 정도, 슬슬 대체 뭐야 웬 뱀이야, 이 추운 나라에 뭔놈의 뱀이야 대체, 밖에 눈 내린다고 지금, 총장 저택 보안은 어떻게 생겼길래 뱀이 침대까지 들어오냐, 대체, 하는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뱀은 아이메리크가 되었다.
*
글쎄… 그 과정에 대해서는 그렇게밖에 할 말이 없다. 뱀은 아이메리크가 되었다. 펑 하는 소리가 나고 연기 속에서 쨔쟌 나타난 것도 아니었고, 천천히 커져 느릿느릿 블록 모형 떼다붙이듯 사람의 형태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냥…아이메리크가 되었다. 그냥…그렇게 됐다. 그냥… 그랬다. 그냥 몇 초간 어…? 하는 생각을 했고, 그냥 입을 떡 벌리고 있었고, 그냥 눈을 깜박깜박 하고 있었더니 그냥…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냥… 그랬다. 에스티니앙이 이성을 되찾았을 때는 이미 아이메리크가 등을 구부린 채 쓰러져 스스로의 목을 잡고 콜록콜록 연신 흐트러진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게 여태껏 자신이 목을 졸랐기 때문이라는 것도 한참 후에 깨달았다. 그냥… 그렇게 됐다.
한참 기침과 흐트러진 숨을 내뱉던 아이메리크는 겨우겨우 몸을 추스르며 팔꿈치로 침대를 짚은 채 엎드린 자세로 천천히 자신을 바라보았다. 타액과 눈물, 땀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길래, 그러니까…저기…어.
저기…너… 일단 옷 좀 입어라. 한참 뒤 자신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
삼십 년을 넘게 지켜온 비밀이라고 했다. -그러냐. 해줄 말은 그것뿐이었다. 뱀의 모습을 가진 수인은 게다가 수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고 했다. -그랬냐.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의 피가 아무래도 원인인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렇구나. 에스티니앙은 자동인형처럼 고개를 띡 뚝 끄덕였다. 멋들어진 위로나 깊은 공감을 표해줄 수 없었던 게, 에스티니앙 자신도 적잖이 당황했단 말이다. 놀란 정도로만 따지면 아마 자신이 더 놀랐을 것이다. 친구 집에서 자다가 깨니 옆에 시꺼먼 뱀이 있었는데다, 알고보니 그 뱀이 집주인 당사자였단 말이다. 에스티니앙의 놀란 가슴은 아무래도 좋은지 아이메리크는 또다시 한숨을 뱉어냈다. -날 싫어하는 자들의 집요한 추적도, 정신을 잃고 쓰러질 만한 일도 촉각을 세워 주의하며 살았는데, 고작 이런 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마를 문지르던 아이메리크는 갑자기 이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고 척척 걸어와 콱 고개를 들이밀었다.
"에스티니앙."
"뭔데."
에스티니앙은 몸을 뒤로 뺐다.
"이슈가르드의 안위를 책임지는 신전기사단의 총장이 뱀이라니 굉장한 일이지 않나? 불길하고 음산하지. 나라 망조의 징조네."
"아니,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너는 어차피 너고…"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고맙다."
말투에서 고마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착각인가. 완전히 자동응답이잖아, 이거. 에스티니앙의 생각은 아무 상관없는지 아이메리크는 몸을 바짝 붙인 채 강경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 내가 이 자리에 오르는 것조차 탐탁지 않아하던 자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떤 근거를 들어 나를 공격해올지는 뻔한 일이다. 에스티니앙. 아이메리크는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수인은 개체수 자체가 극소수다 보니 취미나쁜 도락가들의 수집품으로 거래되는 일도 부지기수지. 사냥당하는 것도 거래도, 그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 그러냐."
"에스티니앙. 네가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했다간 나는 신전기사단의 총장 직위를 박탈당할 것은 물론, 몸의 안위조차 장담할 수 없어질 거다."
"그, 그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총장으로 취임하게 된다면 너도 꽤 머리아파지겠지. 여태껏 내가 암묵적으로 눈감아준 너의 업무방식들도 용납되지 않을지 모른다."
"아니, 말 안 할ㄱ…."
"게다가 너도 알고 숨겼다는 둥 안좋은 소문이 따라다니겠지. 네게도…."
"말 안 한다고! 조용히 좀 해 봐!"
에스티니앙은 결국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말 안 한다고! 애당초 말한다고 잘도 믿어주겠다! 아이메리크 사실 새까만 뱀이더라! 잘생긴 얼굴 그거 다 가짜고 본모습은 뱀이야! 이만해! 어휴! 진짜 기겁했다니까! 이렇게 말하고 다녀 봐라, 어차피 나만 미친놈 될거 뻔하잖아! 아이메리크는 미간을 찡그렸다. 에스티니앙, 전제부터 틀렸군. 내 본모습이 뱀인 게 아니라 내 모습 중 하나가… 짧게 숨을 들이마신 아이메리크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원론적인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지. 아이메리크는 이윽고 천천히 숨을 내뱉고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비밀로 해주겠다면 그걸로 됐어. 대충 걸친 파자마 위로 드러난 얼굴색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뱀메리2
아이메리크가 뱀이란 사실은, -본인의 표현으로 하자면 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엔 곧 무덤덤해졌다. 그러고보니 동물의 모습을 하는 사람, 소위 수인이란 녀석들이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다. 온갖 게 다 있는 에오르제아니 뭐 놀랍지도 않다. 고양이귀 달린 사람이나 뿔 달린 사람이나, 사람 모습으로 변신하는 임프나 야만신으로 변신하는 사람이나, 그 야만신 전부 때려부수고 다니는 빛의 전사 같은 게 산재하는 세계에서 꼴랑 뱀 모습 좀 하는 사람 같은 게 뭐 놀랄 일인가. 아이메리크가 여태껏 숨겨온 것도 이해가 간다. 이슈가르드의 신전기사단 총장, 그 굳건하고 정의로운 아이메리크가 사실은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수인, 게다가 새까만 뱀이란 정보를 아이메리크를 유독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놈들이 손에 쥐었다간 실각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신이니 신화니에 목숨거는 교황청 꼴통들을 보면 당장 횃불 들고 노래에 코러스 넣어가며 아이메리크 녀석 집으로 전진한대도 놀랍지 않다. 사건으로부터 일주일 후 에스티니앙은 아이메리크를 찾아가 그간 생각한 이야기를 전했다. 아이메리크는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로 고맙다. 그리고 한참 뒤 덧붙였다. -진심으로. 짤막한 대답에서는 무게가 느껴졌다.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투구를 꾹 눌러썼다. -그래서, 아이메리크.
"네가 뱀이란 걸 안 지도 두 주나 지났는데…"
말을 내려놓은 순간부터 아이메리크는 강철같은 무표정으로 얼굴을 감쌌다. 모험가가 습관적으로 쓰던 '개정색'이란 말은 아마 이럴 때 쓰는 단어일 것이다. -에스티니앙. 말에 어폐가 있군. 일단 나는 뱀이 아니다. 오해를 살수 있는 발언이군. 일 분 삼십 초쯤 이어진 설교를 묵묵히 공기와 함께 귀 안으로 집어넣던 에스티니앙은 설교가 끝나자마자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이메리크, 네 본모습이 뱀이란 걸 알게 된 지도 두 주나 지났는데…."
"본모습이… 아니, 됐네. 말하게."
반론을 포기한 듯 이마를 감싸는 아이메리크에게 에스티니앙은 말을 이었다. 나, 그때 네 모습 제대로 못 봤거든. 다시 제대로 좀 보자.
이번 잔소리는 일 분 삼십 초로 끝나지 않았다.
*
잔소리 뿐이었을까, 결국은 총장실에서 쫓겨났다. 아니. 호기심 같은 게 아니라니까. 그냥 다시 보고 싶은 거라고. 비늘이 반짝반짝하던걸. 같은 대답을 세 번쯤 하고 있으려니 슬슬 매크로 같은 걸로 만들어 놓으면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메리크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자주 보지 않나? 용 비늘과 똑같은 걸세. 아니, 그렇게 따지면 사람이나 원숭이나 다를 건 뭔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대화를 주고받다 에스티니앙은 결국 손을 들었올렸다. 그만하고, 하나만 묻자. 왜 안 되는 건데? 아이메리크는 즉시 서른다섯개쯤의 이유를 들었지만 결국 보이고 싶지 않다는 한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인정 안 하냐? 그게 네 다른 모습이라는 걸. 툭 던진 말에 아이메리크는 일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윽고 낮은 숨을 들이마셨다.
인정하네. 명백한 사실을 부정해서 뭘 하겠나. 아이메리크의 어투에는 오랜 시간 묵혀온 포기와 분노, 좌절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인정하지 않고 거부할 나이는 지났지. 너나 나나 스스로의 추악한 부분 따위는 별 상처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의 어른이 됐지 않나. 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네. 그뿐이다. 아이메리크는 한 손으로 얼룩이 말라붙은 찻잔을 만지작거렸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웃었다.
"에스티니앙. 이제 그 이야기는 됐지 않나? 네 친구는 나지, 그 뱀이 아니잖아."
"걔랑도 친구하고 싶어서 그래. 나와보라고 해."
아이메리크는 후, 하고 작은 한숨을 쉬었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올리며 그걸 했다. 개정색 말이다. 복도로 쫓겨나는 데까진 삼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뱀메리3
"참, 그러고 보니."
며칠 후였다. 아이메리크는 서류를 내려놓다 문득 생각난 듯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하얀색의 작은 봉투였다. 뭔데? 받아들어 봉투를 열자 촘촘한 문양이 빼곡히 새겨진 티켓 한 장이 팔랑 떨어졌다. 그리다니아, 가을박 마을… 그림자 3월 21일부터…
당장 내일이네. 뭔데. 임무야? 티켓을 접어 다시 봉투 안으로 집어넣으며 묻자 아이메리크는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뱀을 좋아하는 대부호가 애완용으로 기른 뱀과 자연에서 포획한 뱀 수십 마리를 전시용으로 공개한다고 하더군. 그리다니아 북부니 여기서 가깝기도 하고…너도 자주 나가는 곳이지?"
"그래서 뭐?"
"뭐가 아니라… 네가 뱀을 좋아하니 티켓을 구해 왔네."
이런 전시라면 분명 뛸 듯이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 아이메리크의 말은 끝을 마치지 못하고 끊겼다. 물론 끊은 장본인은 에스티니앙이었다. -무슨 헛소리야? 말이 다소 심했나 싶지만 미쳤냐는 반문이 나오지 않은 것인 그나마 다행이었다. 진정하자. 아무리 그래도 본모습이 뱀인 놈 앞에선 말을 조심해야지. 에스티니앙은 후, 낮은 한숨을 뱉고 호흡을 정돈했다. -내가 왜 가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는진 모르겠지만… 이런 곳 다닐 여유는 없어. 아이메리크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납득한 표저은 아니었다. 말이 되지 못하는 의문이 그 잘생긴 얼굴을 촘촘히 채우고 있었고, 그 의문에 대답할 말도 없어 에스티니앙은 주섬주섬 보고서를 챙겼다.
가본다. 잘 가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에스티니앙은 문을 닫았다. 티켓은 여전히 보고서 사이에 끼운 채였다. 안 간다고 정색하고 다시 돌려주기도 뭐했다고…어차피 안 갈 거긴 하지만…아, 됐다. 머리를 긁으며 에스티니앙은 티켓을 결국 옷 속에 구겨넣었다.
*
정말! 절대! 할로네 신에 맹세하고(원래 딱히 믿지 않는 건 둘째치고) 그 얼어죽을 뱀 전시를 보러 간 것은 아니었으나 며칠 후 우 연 히 가을박 마을에 들리게 되었다. 커르다스 아래쪽에서 임무를 하다 좀더 주변을 조사할 겸, 식량도 든든히 사놓을 겸, 슬슬 저녁때니 봐서 숙박도 할 겸 어 쩌 다 들리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 날이 깜깜해지려면 멀었고, 딱히 이 평화로운 마을에서 할 일도 없고, 벌써부터 자긴 너무 이르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다 보니 짐 사이에서 팔랑, 그 티켓이 우 연 히 떨어졌단 말이다. 그래서 어쩌다보니 결국… 아, 그래. 봤다. 그 망할 놈의 뱀 전시.
전시관은 꽤 컸다. 수십은 무슨, 이백 마리는 되겠구만. 평생 볼 뱀은 다 보고 가겠네. 나름 기분 전환도 되고 뭐… 괜찮을지도. 에스티니앙은 생각했다. 조명이 어둑어둑한 통로를 지나며 큰 뱀 작은 뱀 붉은 뱀 하얀 뱀 무늬뱀 민무늬뱀을 반복해 보고 있으려니 역시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까진 그랬다. -아이메리크랑 뭔가 다르네. 얘들이나 아이메리크나 뱀인 건 똑같은데 왜 아이메리크는 사람도 될 수 있지만 말이야, 말 잘하는 우리 총장 나으리, 얼굴도 반반하니 콧대도 잘생긴…. 에스티니앙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온통 까만 뱀도 있었지만 역시 달랐다. 크기가 비슷한 뱀도, 동그란 머리를 세우고 있는 뱀도 모두 어딘가 달랐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그것들은 그냥 뱀이었다.
*
며칠 후 돌아와 간략한 보고를 하다 너 본모습 말이야, 나 그때 제대로 못 봤거든. 다시 좀 보자. 의 메들리를 시작하자 아이메리크는 정색하는 반응 대신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서랍에 손을 가져갔다. 이번에 건넨 편지봉투 안에는 파란 티켓이 들어 있었다. 림사 로민사. 그림자 4월, 전 에오르제아의 모든 뱀! 800종 특별전시…. 에스티니앙은 티켓을 접어 내려놓았다.
"멀기도 하다. 림사 로민사? 내가 여기까지 가야겠냐?"
"좋아하는 걸 보기 위해서라면 갈 만한 거리 아닌가? 800종이라니, 이건 분명 네가 기뻐 새벽부터 줄을 서겠구나 싶어…"
"뱀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고. 애당초 좋아하지도 않아."
그 직후는 잠시 정적이었다. 에스티니앙은 바로 손을 들어올려 사과의 의사를 표했다.
"실언이었다. 네 본모습이 뱀이라는 걸…."
"본모습이 아ㄴ… 됐네. 사과할 이유도 없어. 좋아하지 않는다면 더 잘됐군."
"그래, 별로 안 좋아해. 전에도 봤지만 걔들은 그냥 뱀이더라. 내가 보고 싶은 건 네 본모ㅅ…."
"이제 뱀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에스티니앙."
부드러운 말투에는 단어 사이마다 뚝 뚝 절벽처럼 떨어지는 단호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나도 뱀은 좋아하지 않아. 피차 싫어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잖나. 에스티니앙은 대답 대신 한숨을 뱉었다. 오래 걸리겠어, 이거.
뱀메리4
오래 걸렸지만, 생각보다도 오래 걸렸지만 결국 아이메리크는 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귀찮은 마물 처치니 기사단의 잡일을 몇 번 거들며 푸른 용기사의 업무는 아니지만 본모습이 뱀인 널 변함없이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는 거라고 주기적으로 의견을 전하는(뭐, 사실 생색이었지만) 데는 은근히 시간이 걸렸다. 아이메리크는 결국 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저택에서 두 번, 에스티니앙의 방에서 한 번.
역시 비늘이 반짝반짝하다. 물에 젖은 것처럼 빛이 도는 비늘 수백 개가 촘촘하게 몸을 덮고 있다. 당시는 놀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살짝 솟은 눈매마저 아이메리크와 똑같이 생겼다. 마물로 분류되는 뱀과 달리 머리가 크지 않고 동글동글해 오히려 인상은 글쎄, 인상 팍 찡그리고 있을 때의 총장님보다 순해 보이기까지 한단 말이지…. 도마뱀마냥 품위없게시리 가느다래지는 게 아니라 짧게 모이며 뚝 떨어지는 꼬리의 곡선이나 온통 새까만 비늘 위로 투명한 빛의 윤기가 차르르 도는 비늘이나, 옅은 바닷물 같은 색깔의 눈동자 같은 건 역시 몇 번을 들여다보아도 신기하다. 크기도 처음에 짐작했던 것보다 작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너, 그땐 좀더 커 보였는데… 몸이라도 부풀리고 있었냐? 돌아오는 대답은 물론 없다. 동그란 탑처럼 또아리를 틀고 아무 표정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는 뱀이지만 신기하게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것이 공기를 통해 전해져 온다. 왜 이래, 요샌 잘 지내 놓고…. 혼잣말 같은 주저리를 늘어놓으며 창을 손질하던 에스티니앙은 다시 힐끗 까만 뱀의 또아리를 내려다보았다.
"너, 역시 몸 상태 안 좋은 거 아니냐?"
이거 봐. 이쪽이 헐거운데. 또아리의 틈새에 손을 끼워넣고 흔들자 까만 뱀은 움찔했다가 몸을 펴더니 이불 안으로 스르륵 기어들어갔다. 이건 그거다. 에스티니앙은 재빨리 이불을 걷어 두 손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침대 한가운데에 훤히 드러난 까만 뱀, 그러니까 아이메리크는 또다시 심기가 불편한 듯 신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이불 안에서 사람으로 돌아가 이불로 몸을 감싸고 몸을 만지지 말라는 둥 잔소리를 하려는 심산이 빤히 보이는데 그렇게 둘까보냐. 아이메리크의 옷가지는 이미 적당히 개서 책상 위에 올려놓은 지 오래다. 몸을 가릴 게 없으면 사람으로 돌아가는 순간 나체가 되는 이 녀석은 이대로 있을 수밖에 없다. -포기해, 포기해. 방이 몇 개나 이어진 보렐 자작님 댁이 아니라고.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끝인 내 방이라고. 숨을 데가 없거든. 에스티니앙은 등까지 돌린 까만 생명체에 굳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아이메리크가 이판사판으로 그냥 사람 모습으로 변하기라도 했다간 오히려 더 민망해질 것은 에스티니앙 자신이지만 예의를 갑옷마냥 두르고 있는 아이메리크 녀석이 이런 상황에서 사람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걸 아니 걸 수 있는 도박이다. 아마…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도박은 성공이었다. -그냥 있어. 너도 여기 아니면 편하게 못 있잖아? 본모습으로 좀 쉬라고.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내가 키우는 거라고 해줄 테니까. 한참 고개를 치켜올리고 있던 아이메리크는 이윽고 천천히 다시 고개를 내려놓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움직일 때면 반짝반짝 빛나는 까만 비늘이나 수그라질 때면 더욱 동그란 작은 머리나, 길쭉한 몸의 움직임을 따라 소용돌이처럼 말리는 침대 시트 같은 것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마… 좋아하는 것 같다. 나중에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아이메리크는 특유의 정치적 스마일을 온 얼굴에 띤 채 온 에오르제아의 뱀 전시 티켓을 양팔에 품고 와 안겨주었지만 어디에도 가진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갈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응.
뱀메리5
-흉흉하군. 아이메리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 대단한 대화는 아니었다. 성도는 별로 치안이 끝내주게 좋은 도시는 아니었고, 강도니 납치니 하는 흉흉한 사건이 종종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 날도 그런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알겠네. 나도 좀더 알아보지. 아이메리크는 찻잔과 쿠키 캔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에스티니앙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앉아 있던 의자를 테이블 밑으로 밀어넣었다. -아무튼 조심해. 너도 뱀 모습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말을 툭 내려놓자 아이메리크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돌아다닐 일 같은 것도 없다만… 뭔가?"
"납치당하거나, 취미나쁜 변태 수집가들한테 팔릴지도 모르잖아."
아이메리크는 순간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베어문 스테이크에서 초콜릿 맛이 날 때 지을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아이메리크는 이어 구겨진 표정을 풀고 미소를 띠었는데, 정치판에서 그가 주로 상황을 수습하는 용도로 쓰는 눈웃음이었다. 게다가 입꼬리 한쪽이 허물어져 있다. 아이메리크에게 있어 이런 어설픈 미소는 웬만큼 당황했을 때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다. -에스티니앙. 일단 사과해둘 게 있군. 아이메리크는 여전히 어설픈 미소를 유지한 채 한껏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추욱 늘어뜨렸다.
"-네게 나의 비밀을 들켰을 당시 나는 너무 놀라고 당황했다."
이 장황한 서사, 아이메리크답다.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까닥했다. -그래서 그 땐 그만 다소 과장해 이야기한 부분이 있네. 고가에 거래되거나 변태들에게 인기가 있는 건 고양이나 개, 양 같은 수인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뱀 수인 같은 종류를 굳이 사려는 사람은…없지. 아이메리크는 다시 어설픈 미소를 고쳐 지으며 눈썹을 아래쪽으로 축 늘어뜨렸다.
"네가 내 비밀을 이야기할 남자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당시 놀라 과장해 이야기한 게 네게 겁을 주고 말았던 모양이군. 아직도 내 말에 신경을 쓰고 있을 줄은…"
"아니, 네 말에는 별로 신경 안 써. 애당초 내가 누구 말에 신경쓰는거 봤냐?"
"…없군. 그럼 왜 그러는 건가?"
"내 판단인데. 너, 독 있냐?"
아이메리크는 그야말로 황망한 얼굴이었다. 어이없음을 넘어 언어의 이해 자체를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고, 한참 뒤에야 말의 의미를 이해한 듯 아이메리크는 허공을 더듬는 듯한 눈으로 시선을 맞췄다.
"모…모르겠군…. 누굴 물어본 적이 없다 보니…."
"뭔가 물어봐. 쥐라든가…. 내가 다음에 잡아 올게."
싫다. 대체 내가 왜 쥐를 물어야 하나. 목소리는 황당함을 넘어 떨림까지 섞이고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급히 정정했다. 쥐는 좀 그렇네. 물고기 같은 걸로 하자. 회로 먹으나 그냥 살아있는 거 물어 보나 똑같잖아. 그래, 그럼 되겠네.
"다음에, 실리캔스라도 잡아올게."
"대체 뭔가, 에스티니앙?"
*
"조용이 좀 해 봐. 독이라도 있어야 널 노리는 사람들에게서 네 몸을 지킬 거 아냐?"
"지키고 뭐고, 노리는 사람 자체가 없네."
아이메리크의 표정은 황당 그 자체였다. 넋이 빠진 듯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아이메리크는 뒤늦게 논리적인 반박을 덧붙였다. 애당초 네가 발설하지 않는다면 알 사람도 없겠지만…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야. 조심하라고. 너 예쁘게 생겼잖으니까."
"아니…에스티니앙?"
"착각할까봐 말해 두는데, 물론 뱀 쪽 말이다. 아무튼 뭔가 물어 봐."
한참 입을 벌리고 서 있던 아이메리크는 쿠키 캔과 찻잔 두 개를 주섬주섬 품에 챙긴 채 빠르게 걷기 시작했고, 이내 멀찍이 사라졌다. 그 얼굴에 띠고 있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혹이었다. -나 참. 에스티니앙은 다리를 꼬고 선 채 한숨을 뱉었다. 위험하다니까. 최소한 독이 있는지 알아보기만이라도 하고 싶은데….
에스티니앙의 바람은, 며칠 후 다소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뱀메리6
끔벅.
에스티니앙은 구멍 두 개를 내려다보았다.
에스티니앙!! 자신의 손을 흔들며 절박한 목소리를 연신 내뱉는 녀석은 아이메리크다. 사람인, 아이메리크다. 에스티니앙은 끔벅, 다시 눈을 뜨고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점처럼 작은 붉은 구멍 두 개가 콕 콕, 희미하게 뚫려 있었다.
배는 안 되는 거였나 보다, 에스티니앙은 그런 생각을 했다. 요새는 어째 뱀 모습 보고 싶단 말을 안해도 굳이 뱀으로 스르륵 기어들어오거나, 옆에 또아리를 말고 있거나 가끔은 그대로 제 또아리 위에 고개를 얹고 쿨쿨 자기까지 하던 아이메리크였다. 역시 녀석도 본모습이 편한가보지. 계속 사람 모습으로 지내면서 정치질 하려면 얼마나 피곤하겠어. 에스티니앙은 조용히 그 옆에서 창을 닦거나 갑옷을 정비하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런 시간이 길어졌더니 머리를 문지르거나 목 부근을 쓰다듬는 것 정도는 허용해 주는 듯 손을 뻗어도 얌전히 있길래 녀석이 또아리를 틀고 있을 때면 한 손으로 책을 읽으며 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게 일상적인 휴식이 되었던 것이다.
방금도 그런 시간이었다. 5분, 아니 1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다 문득 아 이 녀석, 왠지 흐물흐물하네… 하는 생각이 들어 자세히 보니 이놈, 평소처럼 완벽한 원뿔형으로 단단하게 착 지어진 또아리가 아닌 어딘가 헐거운 또아리를 구불구불 허물어진 모양새로 대강 짓고 자고 있는 게 아닌가. 뭐 통과시키느라 사흘 밤을 샌데다 몸살기까지 있다더니, 몸 상태가 나쁘면 모양도 안 잡히나 보네. 역시 본모습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려다보려니 녀석 배가 훤히 보였던 거다. 온통 새까만 등과 달리 배 쪽은 약간 밝은 회색을 띠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왠지 웃음이 나와 에스티니앙은 피식 웃었다. 배라고 좀 하얀 거 봐라. 꼭 뭐 묻은 것 같이… 하고 손가락으로 슥 문지르며 말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콱이었다.
배를 문지른 순간 허물어진 모래성 같은 모양새로 자고 있던 아이메리크가 헉하듯 고개를 치켜올리고 이쪽으로 머리를 돌려 이를 박는 데는 이 초도 걸리지 않았다. 잡으려면 잡을 수 있었다. 머리를 추어올렸을 때 자신이 먼저 목을 틀어잡았다면 별 사고없이 무마되었을 것이다. - 하지만 저거, 아이메리크인데. 순간 손을 멈칫한 찰나엔 이미 늦어 있었다. 무방비한 상태에서의 방어본능으로 콱, 침입자의 손에 이를 박아넣은 까만 뱀은 약 삼 초 후 상황을 파악한 듯했고, 에스티니앙은 쭉 한 가지의 생각을 했다. 역시 이거 봐, 이거. 뱀 쪽이 본모습이라니까!
*
원래 몸을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던 아이메리크였고, 조금만 아래쪽을 만지면 사람으로 돌아온 후 꼭 한 마디씩 하곤 하던 아이메리크였다. 주로 에스티니앙, 네가 물론 사심을 담아 만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만져지는 내 입장에선 가슴이나 허리를 문지르는 감촉이 느껴지니 깜짝깜짝 놀라고 당황스럽단 말이네, 같은 소리였다. 뭐 구분가게 생긴 것도 아니고 통자로 생겨먹어 놓고 어쩌란 건지, 유성펜 같은 걸로 여기서부터 가슴 여기서부터 엉덩이 선 찍찍 그어 놓으면 안 만질 텐데, 같은 대답을 돌려주면 조용해지긴 했지만… 결국은 이런 일이 생기는군. 손등에 난 붉은 점 두 개를 몇 초간 바라보다 에스티니앙은 손을 내려놓았다. ㅇ, 에스, 에스티니앙….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손을 덜덜 떨면서 다가온 아이메리크는 새파란 얼굴로 에스티니앙의 손을 바라보다 덥석 그것을 집어들었다.
"에스티니앙, ㅃ, 빨리, 빨리 병원에, 빨리, 아, 그, 그전에 피가 통하지 않게 묶어야…."
"아이메리크, 조용히 해 봐."
에스티니앙은 목소리를 낮추고 아이메리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독이었으면 이미 반응이 왔어. 너… 독은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덧붙였다. 너, 일단… 옷 좀 입어라.
뱀메리7
콱 사건 이후 아이메리크는 자신의 이론, 뱀 본체 아님설을 주장하는 빈도가 현격히 줄어들었다. 양심은 있는 모양이지. 그 야생성으로 사람을, 게다가 십년지기 친구를 물어놓고 본체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낯짝이 두꺼운 녀석은 아니긴 해. 에스티니앙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땐 어땠어? 그림 같은 거 있냐? 언젠가는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툭 던진 적이 있었다. 아이메리크는 영문을 모르겠는 질문도 이제 적응됐다는 낯으로 웃었다. 어릴 적 초상화… 라면 몇 개 있지만, 네가 말하는 건 뱀 쪽이겠지? -그렇지. 당연스럽게 고개를 끄덕 끄덕했더니 아이메리크는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뭐, 그때는 정말 고역이었네. 지금은 그래도 어느 정도 조절이 되지만 그 땐 조절도 내 뜻대로 안되는데다….
"그 때도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냐?"
"아니, 에스티니앙. 뱀으로 변할 수 있었냐고 물어보는 게 보통 아닌가?"
그래서 사람으로 됐어, 안 됐어? 재차 묻자 아이메리크는 시선을 흐렸다. 잘… 되진 않았네. 에스티니앙, 그 역시 뱀 쪽이 본모습이라니까, 하는 시선 좀 그만두지 않겠나....
*
아주아주 작았다고 했다. 가느다랬는지 통통했는지는, 굳이 따지자면 통통한 편이었다고 했다. (나중에는 굳이 따지지 않아도 통통한 편이었다고 인정했다.) 보통 뱀과 다른 점이라면 글쎄, 아주 오랫동안 아주 작았다는 것 정도일까. 슬슬 아장아장 걸어다닐 법한 어린아이 나이가 되어서도 고작 한 뼘 반이 조금 넘을 정도였다고 했으니까. 아, 돌아가신 양어머니께 들은 말이네. 아이메리크는 살짝 웃었다. 작고 통통한 새까만 뱀, 동그란 머리를 요만치 들어올리는 짧고 뭉뚝한 새끼 뱀… 그런 것을 생각하자 문득 먼 과거의 냄새를 맡는 것처럼 포근한 기분이 들었고, 붕 뜬 것처럼 가벼워졌다. -너도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 그런 새끼 뱀이 나오는 거냐? 아이메리크는 피식 웃었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가정을 꾸리겠나. 결혼도, 아이도 생각없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어떤 아쉬움이 들었다. 명확한 대상이 있는 아쉬움, 새까맣고 통통한 한 뼘짜리 뱀에 대한 아쉬움 말이다. 그 다음 순간에 든 감정은 아이메리크의 처지에 대한 연민이었고 그 다음은 묘한 안도감이었다. 명확한 대상이 없는 안도감,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불길한 느낌을 닮은…. -후후. 아이메리크는 고개룰 숙이고 조용히 웃었다. 처음에 들켰을 때는 정말 절망적이었는데, 요샌 오히려 네게 들켜서 차라리 잘됐단 생각이 들어.
신기한 일이지. 아이메리크는 눈을 내리깔고 다시 웃었다.
날 거두어 주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내 비밀을 아는 건 친아버지 외엔 집사장 할아범과 고양이 정도가 전부였지만 한 번도 외롭단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아이메리크는 숨을 들이마시고 한숨을 쉬었다. -비밀을 공유할 사람이 있다는 거, 꽤 좋지? 잔을 들어올리며 툭 말을 던지자 아이메리크는 대답 대신 눈꼬리를 매끄럽게 말며 웃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챙 가볍게 잔을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불길한 안도감은 파스스 파스스 형체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뱀메리 8
그러고 보면 아이메리크는 추위를 많이 타는 녀석이었다. 추위를 탄달지 글쎄, 추위에 약하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평범하게 추위를 타는 녀석들은 커르다스의 눈밭에서 팔을 감싸고 덜덜 떨거나 팔짝팔짝 뛰며 춥다고 오만 법석을 부리는 반면 아이메리크는 차근히 몸 상태가 나빠지곤 했다. 달달 떨지도 않았고 삼 초에 한번씩 기침을 해대지도 않았고 이를 딱딱 부딪치지도 않았다. 그저 차근히 조용해졌고, 눈동자의 색은 죽어가는 전구의 불빛처럼 천천히 어두워졌다.
몇년 전 녀석에게 망토를 덮어 준 적이 있었다. 이십 초반의 병사 시절이었다. 지금보다 더더욱 여유가 없어 주변을 보지 못하던 때였고, 그래서 주섬주섬 망토를 벗어 녀석의 어깨에 걸쳐 주었던 행동에 스스로도 놀랐던 기억이 난다. 커르다스 설원에서의 예기치 못한 야영 이틀째, 제 분의 망토를 덮고 조용히 죽어가는 것처럼 눈밭에 앉아 있던 아이메리크는 한 겹의 망토를 더 둘러 주자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치 죽어가는 동물처럼, 눈이 감기고 숨이 사라져 이윽고 몇 백 번의 계절이 바뀌어 뼈가 되길 기다리는 고대의 생명처럼 눈발이 날리는 하얀 공간 속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뒷모습은 이름도 모를 멸종한 생명체와 닮아 있었다. 어디선가 몇백 년 전의 뼈처럼 앙상한 먼 꿈의 냄새가 났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야영에서 돌아온 이후 아이메리크는 보름간 보이지 않았다. 근무표에는 부상으로 인한 자택 귀가라는 글씨가 화석처럼 쓰여 있었다.
*
그랬어. 네가 추위에 약한 게 뱀이라 그런 거였어. 손가락을 딱 치자 아이메리크는 고개를 돌렸다.
"변온동물의 습성이란 거군. 이제야 알겠다, 아이메리크."
"습성이라니, 개인차라는 단어가 있지 않나. 추위를 많이 타는 것뿐이네."
몇 가지의 이상한 점들이 연쇄작용처럼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이메리크의 침대는 유독 난로와 가까웠다. 술 퍼먹고 손님방까지 가기도 귀찮아 녀석의 침대에 낑겨 잔 날이면 열 밤 중 여섯 밤은 새벽에 더워 깨곤 했다. 니드호그의 불길에 온 몸이 타는 꿈을 꾼 날도 있었더랐지. 더워! 덥다고! 술 마신 걸 감안해도 더워! 반소매 셔츠 한 장과 얇은 바지 차림으로 이불을 다 제치고 오만 인상으로 누워있다 옆을 보면 누빔 양모 파자마를 위아래로 가지런히 갖춰입은 아이메리크가 두 겹의 이불을 덮고 곤히 자고 있곤 했다. 감각이 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울다하 사막에서도 이불깔면 잠드는 거 아니냐고. 짜증을 내다가 결국 몸을 일으켜 난로를 끄고 다시 잠들었다 깨면 어느새 아이메리크가 자기 몸을 안거나 자기 품에 안기거나 둘 중 하나의 방도로 꼭 붙어 자고 있곤 했다. 노인네도 아니고 왜 이렇게 추위를 타. 이상하잖아. 얽힌 몸을 살살 풀고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 나오면 아이메리크는 꼭, 햇볕이 드는 창문 반틈만한 자리에 퍼즐 조각처럼 몸을 맞추고 자고 있었다. 날이 흐려 햇빛조차 없는 날이면 솜사탕 막대기마냥 이불을 몇 겹으로 말고 있었고, 유독 추운 날이면 눈을 뜬 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곤 했다. -잘 잤나, 에스티니앙. 어제는 날이 추웠지.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유독 피곤해 보였다.
"그게 다 뱀이라 그랬던 거였군. 추우면 유독 못 일어나는 것도, 저 침대 옆 난로도. 어쩐지, 난로가 바람불면 불붙겠다 싶은 위치에 있더라니."
팔을 뻗어 난로를 가리키자 아이메리크는 입술을 열었다가 곧 꾹 다물었다.
"따듯하고 편안하게 자고 싶을 뿐이야. 못 일어나는 일도 없네."
"난로 꺼 버리면 나한테 덩굴처럼 얽혀 잤던 건 기억하고?"
"그건…미안하군. 네 편의를 위해서라도, 손님방에서 자 주면 고맙겠어…."
아이메리크는 말꼬리를 흐렸다. 에스티니앙은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보통 손님방에서 자잖아."
"그렇지."
"뭐, 이유를 알았으니 됐어."
-어쨌든 넌 남이랑 안 자는 게 좋겠다. 감 좋은 녀석이면 눈치챌걸. 아이메리크는 웃었다. 잘 곳도 모자라던 말단 병사 시절이면 모를까, 이제 와선 같이 잘 남이라곤 너나 고양이 정도네. 둘 다 내 비밀을 알고 있으니 문제없지. 게다가 둘 다 내 침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우리 고양이는 너와 달리 따듯한 곳을 좋아하긴 하지만, 제가 내킬 때만 내 품에 안기는 상전이라…. 아이메리크는 그리고 한참 동안 고양이의 이야기를 했다. 에스티니앙도 잘 아는 보렐 가의 하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 하등 중요성이라곤 찾을 수가 없는 이야기…. 뭐, 나쁘지 않지. 에스티니앙은 턱을 괴었다.
뱀메리 9
또 하나 알게 된 녀석의 습성이 있다. 추위와 달리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이메리크도 수인의 영역에서 나오는 특성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아이메리크나 자신이나 본디 식사를 적게 먹는 편은 아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에스티니앙 자신은 남들보다 조금 더 먹었고, 아이메리크는 평범하게 성인 남성 1인분의 식사를 했다. -했다고 생각했다. 진실을 안 것은 녀석이 뱀이란 걸 알게 된 이후였다.
아이메리크는 평균적으로 성인 남성의 세 배에서 네 배 정도를 먹는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밖에서는 이렇게 먹지 못하지. 누가 봐도 이상한 풍경이니 말일세. 무던하니 그런 말을 하며 자기 머리통만한 고기를 한 시간에 걸쳐 먹는 걸 보고 있으려면 이상한 기분이 되기도 했다. 허겁지겁 먹지도 않고, 게걸스럽게 해치우지도 않는다. 손에 배인 우아한 칼놀림은 급해지는 일이 없다. 배가 고파 먹는 것도 아니고, 먹고 싶어 먹는 것도 아냐. 그냥…먹지 않으면 몸이 버티지 못하네. 아이메리크는 평온하게 말하며 마지막 고기조각을 입 안으로 옮긴 뒤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이 녀석, 집이 잘 살아서 정말 다행이군. 정말로. 에스티니앙은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곧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밖에서는 괜찮은 거냐? 여럿이서 저녁까지 먹는 일 많잖아. 특사 임무는 어떡해?"
"사나흘 정도 굶는…아니, 평범한 사람처럼 먹는다고 해서 큰 문제는 없어. 그 전후로 훨씬 더 많이 먹기만 하면. 아마 닷새…버티면 일주일까지도 괜찮을 걸세. 그 이후는 잘 모르겠군."
그 이후는 잘 모르겠군. 그 말에는 가볍지 않은 무게가 있었다. 어떻게 되는 건가. 죽는 건가? 성인 남성이 하루 세끼를 보통의 성인 남성만큼 먹었단 이유로? 표정을 읽었는지 아이메리크는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말게, 에스티니앙. 멀리 나갈 땐 나도 대비 정도는 해. 남몰래 음식을 먹는 것도 이젠 꽤 능숙해졌지. 두려울 건 없어. 아이메리크는 잔을 저었고, 에스티니앙은 식은 찻잔을 손으로 감쌌다. -결국 남들은 죽지 않고 버티는 추위와 굶주림에서 넌 죽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그건 두려운 일이 아닌가? 툭 말을 던지자 아이메리크는 잔을 만지작거리다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뭐가 가장 두려운지 모르겠어, 에스티니앙.
아이메리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내가 꾸는 악몽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꿈이 아냐. 추위와 굶주림을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뱀으로 변해 버리고 마는 꿈이지. 모두가 있는 곳에서, 뱀으로 변해,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비명을 지르고, 놀람과 당황이 들어찼던 눈들이 점차 경멸과 혐오의 빛으로 변해 내 몸에 꽂히는데, 움직일 수는 없어서 계속, 영원히 그렇게…. 아이메리크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네 모습을 좋아해.
말은 생각보다 빠르게 입을 스쳐 나갔다. -나는, 네, 모습을, 좋아해. 그게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도 말의 낱자 하나하나까지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진 후에야 깨달았다. 침묵 속에서 까만 마침표까지 촛불에 녹아 사라진 후에야 에스티니앙은 잔을 내려놓았고, 아이메리크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나의 뱀 모습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싫어하지 않는 게 아냐. 좋아한다고. 네가 감사하든 말든 하등 상관없이."
당시는 그랬다, 뭐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들은 죄다 해 버렸지만. 아이메리크가 자꾸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탓이다. 에스티니앙 자신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아이메리크는 조용히 웃었다. -그거야말로 네가 내 감사에 상관이 있든 말든, 나는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
"에스티니앙, 뱀이 본모습이란 네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 특히 물질적으로 말이야. 아마… 나는 죽으면 뱀의 사체만 남을 거다."
아이메리크는 잠시 말을 멈추었고, 후 숨을 뱉었다.
"나는 그게…견디기 힘들군."
그 뒤로는 한참 동안 침묵이었다. 먼지가 가라앉고 눈이 내리고, 밤이 한 겹쯤 더 어두워질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생각이 몇 번이고 머리를 때렸다. 날씨라든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든가, 하얀 고양이의 이야기 같은 아무래도 좋은 화제를 다짜고짜 꺼내야 한다고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직감을 따르지 못하고 입을 다문 사이 아이메리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에스티니앙, 네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어.
에스티니앙. 내가 만약 죽게 된다면, 전장에서든 어디서든 죽게 되고 그때 만약 네가 내 옆에 있다면. 아이메리크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뒷부분은 안 들어도 뻔하군. 역시 그 살찐 고양이 이야기나 꺼낼 걸 그랬다. 에스티니앙은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 넘겼다.
"네 시체를 거두어 달라는 이야기겠지, 아이메리크."
"…굳이 거두지 않아도 상관없네."
숨겨 줬으면 해. 묻든, 태우든, 구름바다의 아래로 던지든 상관없어. 발견되지 않게 해줬으면 해. 아이메리크는 세 개의 문장을 세 개의 나무토막처럼 툭 툭 툭 내려놓았다. -기댈 수 있는 건 너밖에 없군. 짤막한 덧붙임엔 오랫동안 풍화되어 건조해진 절박함이 말라붙은 껍질처럼 묻어 있었다. 부탁에는 처음부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메리크는 웃었다. 아이메리크가 다시 찻잔을 잡았을 때 식탁 건너편에서는 하얀 털뭉치 비슷한 것이 카펫을 가로지르며 다가와 아이메리크의 다리에 머리를 부볐다. -저런. 냐아냐아 소리에 아이메리크는 몸을 숙였다. 배가 고픈 모양이야. 집사가 요새 밥을 줄였거든, 건강 문제로…. 보게, 살이 조금 빠지지 않았나? 아이메리크는 하얀 털돼지같은 생명체를 안아들어 두둑이 접힌 배를 가리켜 보였다. 에스티니앙은 대답 대신 남아 있던 와인을 입에 털어넣었다. 저 웬수 같은 고양이, 조금만 더 일찍 왔어도 찝찝한 부탁 따위 안 들을 수 있었다고. 그러고 보니 너네 고양이, 로 시작하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고. 아-… 젠장. 머리 아프다.
뱀메리 10
아이메리크는 자고 가라며 손님방을 내줬지만, 멀뚱히 누워 있어도 잠은 오지 않았다. -글렀군. 날이 천천히 밝아지기 시작할 때쯤 에스티니앙은 저택을 나왔다. -먼저 돌아간다. 아이메리크가 물으면 그렇게 전해 줘. 저택 앞의 기병에게 전하고 제 방으로 돌아온 이후 며칠간 아이메리크를 만날 일은 없었다. 닷새쯤 됐을까, 아이메리크가 술 한잔 하지 않겠냐고 링크펄로 통신을 날렸지만 그때는 서부고지 한복판에 있었다. -사룡의 일당이 있단 정보를 들었거든. 응. 그래. 며칠간은 여기 있을 것 같다. 뭐, 적당히 막아 줍쇼, 총장 나으리. 그래. 알았다. 돌아가서 봐. 너도 조심해라. 에스티니앙은 통신을 끊었다.
성도로 돌아간 것은 정확히 일주일 후의 밤이었다. 역시 무리하지 말고 매의 보금자리에서 하루 더 묵을 걸 그랬나. 젠장, 체력이 한창 때 같지는 않네. 에스티니앙은 부지런히 거리를 가로질렀다. 지치기도 지쳤지만 배도 고프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배만 대충 채웠으면 좋겠는데, 이런 밤에 먹을거리를 파는 덴…. 그래. 구름안개 거리의 주점에서도 적당한 요리는 팔지. 거기로 가자. 에스티니앙은 방향을 틀어 다시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가장 빨리 되는 적당한 걸로. 아, 차가운 거 말고. 따듯한 거. 양파 그라탕? 그래, 좋네. 그걸로 줘. 에스티니앙은 빈 테이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적당히 빨리 먹고 들어가서 따듯한 물로 샤워하고 침대에 누워야지. 내일은 느지막이 나가 보고하고, 용기사단 상황 체크하고…. 저녁은 시간이 비겠는데, 별일 없으면 아이메리크랑 저녁이나 할까. 그럼 되겠군. 완벽하군. 에스티니앙은 하품을 했다. 아마 완벽했을 것이다. 저 뒤쪽 구석의 테이블에서, 어떤 말소리만 들리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신전기사단의 총장, 뱀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에스티니앙은 천천히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목을 돌렸다. 아니, 모르겠다. 천천히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검은 독사라는 별명이라면 유명하잖아. 새삼스럽게 무슨 소린가?"
"양반아, 그게 아니라. 뱀 수인이라는 거야. 진짜 뱀이라고. 내가 교황청에…."
그 순간엔 정말로 놀랐던 모양이다. 아무튼 직후 3초 정도의 기억이 없다. 아마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뜨고 그쪽을 쳐다봤던 것 같다. 다행인 점이라면 그 얼굴이 놀란 표정보다는 무서운 표정에 가까웠던 것 같았단 점이다. 느껴지는 시선에 이쪽을 흘긋 쳐다본 남자들은 금방 입을 다물었다. 늦은 밤 한적한 주점, 총장의 뒷담을 하고 있던 으슥한 구석 자리에 하필 총장의 충견, 혹은 총장의 미친개란 비아냥 섞인 별명이 유명한 현 푸른 용기사가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는 괴담은 꽤 오랫동안 성도를 떠돌았다. -떠돌았다고 한다. 나중에서야 들은 말이다. 당시는 그런 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퍼졌다. 아이메리크가 뱀이란 소문이 퍼졌다. 들킨 건가? 그 사이에? 언제부터? 어떤 루트로? 어떻게? 그야말로 어떻게 녀석의 집까지 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저택은 유독 조용했다. 까만 하늘에선 먼지 같은 눈이 비밀처럼 내리고 있었고, 정원의 가로등 하나가 깜박 깜박, 수명을 다한 듯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미줄이 내린 철문의 귀퉁이에는 어떤 음산함이 녹슬어 있었다. 굳게 잠긴 문을 바라보다 에스티니앙은 저택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아이메리크의 침실 창에서는 어두운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둔 전등의 불빛이다. 알고 있다. 아이메리크는 잘 때면 꼭 등을 켜고 잔다. 그렇군, 집에 있군. 잠든 모양이지. 그래, 자고 있을 것이다. 그 난로 옆의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서 두 겹의 이불을 덮고, 곤히 자고 있을 것이다. 뻔하다. 뻔하지만, 마음이 좋지 않다. 회색 그늘이 어둡게 진 노란 불빛이 창밖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가볍게 점프해 침실 창틀에 발을 디뎠다. -잠금쇠는…안 걸려 있군. 창문을 들어올리자 문은 경쾌하게도 죽 올라갔다. 에스티니앙은 완전히 열린 창틈 사이로 발을 집어넣고 몸과 머리를 차례로 통과시킨 후 창을 잡고 있던 손을 조용히 놓았다. 걱정할 건 없다. 뻔히 잘 자고 있을 테니까. 봐라, 이렇게 침대에 잘…
없다.
없다. 아이메리크가 없다. 베개에 까만 머리가 놓여있지도, 이불이 불룩하니 솟아 있지도 않다. 에스티니앙은 방을 훅 빠르게 훑었다. 난로는 타닥타닥 타고 있었고, 침대 옆의 전등은 약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침대 아래의 러그에는 한 쌍의 실내화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채였다. 아이메리크의 것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그렇다. 침대는 심지어 정돈된 상태가 아니다. 이불이 흐트러져 있다. 젠장, 젠장, 젠장. 아이메리크, 아이메리크, 젠장, 젠장.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이불의 끄트머리를 잡고 에스티니앙은 이불을 걷어냈다. 드러난 하얀 시트는 역시 아무것도,
"……."
…있다. 까만 뱀 한 마리가 또아리조차 틀지 않고 최소한의 뱀다움마저 갖다버린 듯한 적당한 모양새로 널브러져 있다. 자고 있다. 그것도 잘. ……. 한참 할 말을 잃은 사이 뱀은 몸을 움찔했고, 버둥 몸을 일으켰다가 에스티니앙과 눈을 마주치자 물색 눈을 두 번 깜박였다. 스르르르 시트를 기어 침대를 내려가 구불구불 카펫을 타고 드레스룸의 문틈 사이로 사라진 까만 뱀은 곧 파자마를 갖춰입은 아이메리크가 되어 나타났다. 에스티니앙, 무슨 일인가? 이 새벽에 그것도, 창문으로 들어온 것 같ㄱ….헝클어진 곱슬머리를 넘기며 읊던 아이메리크의 목소리는 에스티니앙이 콱, 발로 땅을 디디는 소리에 막혔다.
"본체가 뱀인 것도 아니라는 분이, 이렇게 잘 일이냐? 왜 사람 헷갈리게, 너, 내가, 정말…."
"그게, 피곤할 땐 이 모습으로 쉬는 게 더 휴식이 잘 된달지, 정말 가끔이네만, 그것도 네 앞에서 변한 후로나 가끔, 그…에스티니앙, 뭔가 화났나…?"
에스티니앙은 숨을 크게 삼켰다. 천천히 뱉어냈고, 다시 삼켰다. 이십 초쯤 들여 호흡을 원래대로 되돌린 후에야 에스티니앙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온 몸의 힘이 다 빠진 기분이네, 젠장. 먹을 것 좀 내놔. 다시 배고파졌어. 그것도 엄청. 아이메리크는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
고용인들도 다 자고 있을 테니, 내가 간단한 거라도 만들어 오지. 숄을 두르고 방을 나섰던 아이메리크는 일 분도 안 되어 다시 돌아왔다. 하녀 한 명이 일어났더군. 네 말소리가 들렸던 모양이야. 자신이 하겠다고 해서 돌아왔네. 아이메리크는 침대 옆에 앉았다. 이 집에 귀가 밝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인가. 젠장… 놀란 가슴이 돌아오질 않네. 에스티니앙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아이메리크는 하녀가 가져다준 샌드위치와 수프를 침대 머리맡 테이블에 올려놓았고, 에스티니앙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간 별 일은 없던 모양이지, 아이메리크."
"보다시피. 대체 무슨 일인가?"
"주점에서 네가 뱀이라고 떠드는 남자를 만났어."
널 싫어하는 녀석들이 떠들어대는 보렐 가 독사니 하는 유치한 소리가 아니라, 진짜 뱀이라고 말하는 남자가 있었다고. 어떻게 된 거냐고. 아이메리크는 숄을 고쳐 감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소문은 있는 모양이네. 아무래도… 아이메리크는 입을 닫고 교황청 쪽을 가리켰다. -네 아버지 말이냐? 아이메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건 내 추측이지만, 교황청의 나이 지긋한 원로 중에는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 때의,
"-아기뱀 때의."
"…그렇다고 해 두지. 아기뱀 때의 모습을 본 사람도 있을지 몰라."
교황의 명예에도 해가 되는 내용이니 대놓고 밝히진 못하겠지만,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는 건 어쩔 수 없지. 아이메리크는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뭐, 널리 퍼지는 소문도 아닐뿐더러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없을 걸세. 하지만 네게는 일러둘 걸 그랬군…. 아이메리크는 눈썹을 늘어뜨렸다. 에스티니앙은 물끄러미 그 얼굴을 쳐다보다 식어 막이 생기기 시작하는 수프를 한 숟갈 떴다. -걱정이라면 괜찮다, 에스티니앙. 내 몸 정도는 내가 지킬 수 있네. 아이메리크는 말했다.
"네가 적당히 실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어."
"적당히, 라…. 물론 전설적인 푸른 용기사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들어. 하지만 네가 뱀이란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다르지. 정치적인 협박은 빼두더라도, 당장 네 습성에서 기인하는 약점이 몇 개냐. 남들의 몇 배는 먹어야 하지, 추위에도 약하지, 게다가 너, 추우면 잘 못 일어나잖아. 네가 뱀인 걸 알고만 있다면, 잡으려면 잡을 수 있는 녀석들이 수두룩하다고."
강점이라곤 정말 하나도 없군…. 놀라울 정도다. 독이라도 있으면 좀 좋아. 에스티니앙은 혼잣말을 뱉으며 수프 한 숟갈을 목으로 꿀꺽 넘겼다.
"네 존재를 싫어하는 교황청 광신도들이나 귀족 돼지들도 그렇지만, 순수하게 수인으로서의 네 존재나 뱀 모습에 매력을 느끼는 놈들도 있을 거 아냐."
"전에도 말했지만, 그쪽의 확률은 영에 수렴하네. 상식적으로, 세상에 뱀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이메리크는 말을 멈추고 숨을 삼켰다.
“-미안하군. 네게 실례가 되는 발언이었다.”
아니, 나도 안 좋아한다고. 에스티니앙은 목까지 올라온 말을 샌드위치와 함께 삼켰다. 좋아하지 않는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솔직히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아이메리크는 다르다고. 비늘도 반짝반짝하고, 예쁘다고. 물빛 윤기가 이렇게 차르르르 떨어지는데, 그게…. 뭐, 말해도 못 알아듣겠지만. 에스티니앙은 두 번째 샌드위치 조각을 삼켰다. 그리고 뱀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세상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수집가와 변태들이 있는데 무작정 괜찮다는 건지. 안전불감증이 따로 없지. 에스티니앙은 마지막 빵조각을 입에 털어넣었다. 아니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 녀석, 내가 이불을 걷고 쳐다봤을 때는 일어났어. 뱀일 때도 인기척 정도는 느낄 수 있는 거겠지. 자신의 기척을 눈치챘다면 아마 웬만한 녀석의 기척은 다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자다 잡혀가는 일 같은 건 없을 거야. -어이, 아이메리크. 접시를 정리하던 아이메리크는 미소를 띤 채 돌아보았다. 뭔가?
"아깐 잘 일어나더라. 내가 들어와 이불을 들쳤을 때. 습관대로 기척을 숨기고 있었는데 네가…."
"아, 추워서 눈이 떠졌네."
이 놈 이거, 이불에 싸놓기만 하면 비공정에 태워 울다하 사막을 횡단해도 자고 있을 놈, 아주 우가마로 광산에 집어던져도 자고 있을, 이 희망이 없는…. 에스티니앙은 머릿속으로 떠오른 스무 가지 정도의 욕지거리를 마음속으로 내뱉고 훅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너무 놀랐으니 자고 가련다. 잠옷 좀 빌려줘. 베개 두 개를 가지런히 정리하자 아이메리크는 웃었다.
"뜻대로. 하지만 난로는 끄지 말아줘, 에스티니앙."
"하…알았어."
오늘은 니드호그의 꿈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군. 젠장. 에스티니앙은 찰칵, 침대맡 창문의 잠금쇠를 잠갔다.
20170830 미완
20170924 추가 미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