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냐. 에스티니앙은 머리를 넘겼다. 이거 진짜냐고.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탄식에 눈앞의 청년은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헝클어진 까만 곱슬머리를 기울이며, 해진 소맷단 아래로 안고 있는 건초더미를 주섬주섬 모아 다시 꼭 끌어안으며였다. 청년은 동그랗게 눈동자를 굴렸다가, 다시 웃었다. "저…그러니까, 누구시죠?" 진짜냐고. 이거 정말이냐고, 현실이냐고. 에스티니앙은 천천히 기계처럼 팔을 올려 스스로의 이마를 짚었다. 눈을 감았고, 떴다. 그리고 생각했다. 거리의 모험가들이 자주 쓰던, 자신만은 입에도 익지 않아 진저리를 치며 싫어하던, 평생 쓰지 않을 줄 알았던 표현을 이번 한 번만은 빌려야겠다고. 와. 이거 실화냐. *** 아이메리크가 사라진 것은 두 달 쯤 전의 일이었다. 두 달이..
그림자 1월 23일 머리가 까만, 상냥한 인상의 사람에게 구해졌던 것을 기억한다. 별빛 2월 27일 내 이름은 SRE-7. 그 사람만 나를 가끔 에스티니앙이라고 불렀다. 이 일기장을 사다 준 것도 그 사람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일기를 쓰는 걸 좋아했지. 너도 무언가 기록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쓰도록 해. 그 사람은 무릎을 굽히고 두툼한 공책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아무 무늬가 없는 흰색 표지는 마음에 들었지만 무언가를 쓸 마음은 들지 않았다. 별빛 2월 28일 그 사람은 가끔 일기를 쓰냐고 물었고, 고개를 저으면 조용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기록할 만한 일은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집에서 살게 된 이후로는 그랬다. 매일 좋은 음식이 나왔고, 솜털 같은 옷을 입고 부..
0. 아무튼 세상은, 전부 저 구름 사이로 흩날려 사라지는 솜털 같은 일들 뿐이야. 1. "들었어? 앙델루 경이 실력 좋은 제작자를 구하고 있다고 하던데." 모험가는 뒤를 돌아보았다. 두 명의 남자가 눈이 부슬부슬 쌓인 보석훌장 거리를 가로질러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들었어. 림사 로민사에 잘 아는 대장장이가 있다고 했더니 시일이 급해서 이 근처에 있는 사람을 구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오른쪽의 남자가 옷깃을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일로 제작자를 찾나 몰라." "듣자하니 구름바다의 야만족과 관련된 일이라던데. 뭐, 사령관씩이나 되는 양반이 하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총장…아니, 이제는 의장 겸 총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 사람이 지시한 일이겠지만. 그럼 더더욱 감이 안 잡히는군..
뱀메리1 "도대체 왜 그걸 보고 도망가지 않는 건지." 아이메리크는 여태껏 열다섯 번쯤 뱉은 한숨을 다시 푹 뱉어냈다. 멀찍이 의자에 몸을 구기고 앉아 있던 에스티니앙은 천천히 허리를 들었다. "한숨 좀 그만 쉬어. 그럼 거기서 겁쟁이처럼 도망가냐?" "당연하지 않나?" 아이메리크는 이쪽을 쳐다보았고, 스스로의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열여섯번째 한숨을 뱉었다. * 일상이었다. 며칠 죽상이던 녀석이 골치아픈 일이 풀렸다고 간만에 훤한 얼굴로 웃길래 에스티니앙 자신 쪽에서 술이나 한잔 걸칠까냐고 말을 꺼낸 게 시작이었다. -좋지. 아이메리크는 말을 받으며 쾌활하게 웃었다. 주점도 좋지만, 오늘은 편하게 마시고 싶은데. 오랜만에 내 집에 들르겠나? 하는 제안에 이번에는 에스티니앙 스스로가 콜을 외쳤다. 아이메리..
-붉은전갈단 두목(43, 휴런).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연애는 쪽팔린 계기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두목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술먹고 링크펄로 고백을 했다느니, 내 친구 누구는 공개 프로포즈 이벤트를 했다느니 하는 부하들의 잡담을 듣고 있자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부끄러운 일 하나 없이 시작하는 연애 같은 게 있을 것 같냐. 로맨틱한 고백이니 운명적인 만남이니 하는 건 상상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고, 아무튼 연애란 건 대부분 창피한 사건으로 시작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지금 이 순간도 어디선가 쪽팔린 계기로 연애를 시작하는 커플이 있을 거라고. 대충 그런 말들을 마음속으로 늘어놓고 있으려니 중년의 부하가 스르륵 다가와 생각을 끊었던 것이다. “큰일났어요, 두목.” 뭐야? 고개를 돌리..
* 모험가는 이성적 판단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성적, 논리적, 합리적, 그런 단어들과는 도무지 친해질 수가 없었다. 모험가는 따지자면 직감에 의존하는 쪽이었다. 그 편을 좋아했다. 빽빽이 들어찬 답안지 같은 이성적 판단들 사이에서 반짝반짝 피어나는 직관적 사고를 휘어잡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모든 순간마다 닥치는 선택의 기로에서 모험가는 대부분 직감을 잡았다. 연기처럼 피어나는 영감을 잡는 순간 차오르는 짜릿한 쾌감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슬픈 것은, 가끔은 이성적인 사고를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 그랬다. 모험가는 눈밭에 쓰러진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길게 설명할 것도 없는 습격이었다. 아무튼 아이메리크는 적이 많았다. 가끔은 지금까..
0. 아, 아. 몇 번이고 목소리를 내 보았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없었다. 지직지직 잡음을 내던 링크펄은 그 잡음이 마지막 호흡이었던 양 이제는 죽은 듯한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아 젠장, 욕설을 내뱉어 봐도 몇 번이고 흔들어 봐도 수명을 다한 링크펄이 되살아날 기미는 없었다. 에스티니앙은 링크펄을 벗어 눈밭에 던졌다. 멀리 나왔다는 자각은 있었다. 여관방에 짐도 다 풀고 요기나 하러 내려간 식당에서 사룡의 잔당들에 대한 정보를 들은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갑옷을 다시 입기는 귀찮았고, 굳이 입어야 하는 일도 아니었다. 창만 쥐고 마을 밖으로 나온 것도 사실 딱히 무모한 일은 아니었다. 창을 든 푸른 용기사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이 변두리 시골 마을에 존재할 턱이 없었다. 만약의 경우가 생긴다 해도 연락..
* 정확히 2주 전의 휴일이었다. 내 주제에 맞지 않는 제법 괜찮은 식당에서 식사를 했던 날이기에 기억하고 있다. 그날 하루는 여하튼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이제 와선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래서 스스로를 위로할 겸 맛있는 걸 먹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기억하고 있다. 말하자면 보상심리다. 식사는 평범한 맛이었다. 비슷한 음식을 네 개쯤 사먹을 수 있는 금액이 찍힌 영수증, 이런 식당이 일상이란 듯 테이블에 앉아 떠드는 잘난 놈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또 짜증과, 부아와, 울화 같은 것이 치밀어 나는 수저를 놓았다. 이런 맛없는 걸 먹고 재수없는 상판들을 보기 위해 비싼 돈을 내야 한다니 문득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고, 이 부당하게 잃은 부분을 충당해야 한다는 강렬한 의식..